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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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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76) 박서영 시인이 찾은 합천 영상테마파크

현실처럼 환상처럼, 과거로 떠난 시간여행

  • 기사입력 : 2013-12-1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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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천 영상테마파크에 조성된 전차가 있는 1950~1960년대 도심 거리.
    반도호텔
    조흥은행 건물
    테마파크서 찍었던 영화·드라마 핸드프린팅.
    서울역
    상가 거리



    바람이 불어. 1968년이라는 연도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울 것 같아. 방금 태어났기 때문이지.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이 기분이 뭔지는 모르겠어. 엄마의 뱃속에서 밖으로 갑자기 나와 버려서 잔뜩 긴장하고 있어. 촉감과 냄새가 조금 다른 것 같아.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버린 물고기처럼 두려워. 나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눈을 뜨면 이상한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 같아. 고장난 기묘한 시계가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놓기도 할거야. - <조끼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는 토끼처럼 중얼거리며>



    합천 영상테마파크 입장권을 손에 쥐고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두렵고 아름다운 세계. 그러나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눈송이까지 내리고 있질 않는가. 미장센이 기막힌 풍경 속에 나는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무대가 어디까지 나를 데리고 갈 수 있을까. 1968년 삼산면 대독리. 내가 태어난 곳은 산골이었는데, 산 너머는 바다였다. 태어나보니 마을에 집이 세 채, 마당에 서면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끔 농담을 한다. 내가 태어나보니 우리 마을에 집이 세 채, 달도 세 개, 태양도 세 개, 별도 세 개, 무덤은 참으로 많았답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는 고향은 그렇다. 조금 이상하고 몽상적이기까지 하다. 현실이 아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든다. 누군가 지금 많이 아프니까 시간을 되돌려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나도 그러자고 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위선과 위악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상처가 없었던 시간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아픈 시간이 묵묵히 흘러가고 있다. 한 번 지나온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처럼 허둥대면서, 어리둥절해 하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은 견디기 위해서라는 걸 안다. 그렇다. 견뎌야 한다. 유쾌하게 명랑하게 슬프게.



    테마파크에 눈이 내린다. 농담 같다. 웃어 본다. 테마파크에 눈이 내리니까 그냥 웃고 싶어졌다. 시간을 되돌려 불시착한 느낌이다. 새로운 기억과 추억을 만들며 눈보라 속으로 걸어본다. 경성역 앞을 서성이다가 불 켜진 우동집으로 들어갔다. 일본식 우동집이다. 작은 창문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바람이 휘파람을 불면 눈이 잠시 날아가다가 녹는다. 쌓이지 않는다. 결코 땅에 안착하지 않는 눈발이다. 내 심장 깊이 들어왔지만 심장에 안착하지 못하는 사람 같다. 그런 종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누군가의 심장에 발을 내리고 스며들어 영원히 남는 종족인가. 심장에 내려앉지도 못하고 흩날리다가 사라지는 종족인가. 모두 사라질 운명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닮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 대답을 만들지 말고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우동이나 먹고 헤어질까? 희고 쫄깃쫄깃하고 굵고 긴 우동 한 그릇 먹으면 마음이 따스해질 것 같다. 이 추위가 가실 것 같다.

    우동으로 배를 채우고 나오니 눈이 그쳐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테마파크 안내지도를 들고 천천히 걸어보았다.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만들어진 오픈세트장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서울역이다. 1925년 역사가 준공되어 경성역으로 불리었다. 일제강점기 거리, 종로경찰서, 극장, 백화점, 병원, 은행, 신문사. 찬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재밌는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타이프라이타, 도로시 미싱, 고려타자학원, 동시상영, 전파사, 전자테레비, 경성뎐당포…. 사라져 버렸거나 사라지는 단어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마음대로 상상해보는 것도 심심하지 않다. 그 사이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노랑 고양이가 스치듯 지나갔다. 우동집 창문으로 살짝 보였던 녀석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영상테마파크에서 찍은 초기 작품이다. 서울 종로거리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진태’ (장동건)와 동생 ‘진석’(원빈)이 한국전쟁으로 엇갈린 운명 속에 놓이게 된다. 애국 이념도 민주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진태’와 전쟁을 통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석’의 형제애를 그린 전쟁영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합천 영상테마파크를 현재로 끌어올리는 데 초석이 된 작품이다. 이후 수많은 영화, 드라마, CF 등을 이곳에서 찍었다. 영상물은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돌려놓는다. 현실처럼 환상처럼 영화 속을 걷는다. 마이웨이, 에덴의 동쪽, 서울1945, 각시탈, 포화 속으로, 청춘예찬 등의 세트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누구나 한때 젊었고, 사랑했고, 가난하기도 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때 아팠고 행복하기도 했을 것이다. 인생의 순간들이 영화 속에는 펼쳐져 있다. 아름답게, 혹은 고통스럽게! 그리고 때때로 그것들은 반복되기도 한다.



    시간의 세트장은 평화롭다. 그 시절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지나간 시간의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풍경은 조금 적막할 뿐이다. 담담하게 슬픔이 밀려오지만 그건 내가 어른이 돼버렸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구멍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수많은 사연들이 그 구멍 속에 살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에 시간의 구멍을 통해 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건 오랜 과거이거나 미래일지도 모르지. 사실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평생 잠만 자거나 평생 눈을 말똥말똥 뜨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80년대 세트장은 왠지 낯이 익다. 헌책방, 빵집, 극장, 중국집, 여관. 해가 질 때까지 80년대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사춘기였다. 그리고 청춘의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세트장은 좁고 어두웠다. 나는 청춘을 모방하고 싶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청춘! 그건 초원의 빛 같은 것. 그리고 이 순간도 그렇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남으리’ 워즈워드의 시 한 구절을 중얼거리다보니 가슴이 뛴다. 주술이나 주문을 외는 것 같아져. 돌아보면 슬픈데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자꾸 떠오르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는 2013년 겨울로 돌아온다. 먼 시간을 여행한 후 고단한 가슴으로 시계를 찾아본다. 당신의 시계처럼 정확히 돌아가는 시계가 내겐 없다. 시계란 시간이 없으면 소용없는 거다. 그런 데도 나는 소용없는 낡고 고장 난 시계가 좋다. 멈춰버린 시계 속에서 내 시간은 마음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시간의 모험이 매일매일 시작된다. 어제 이야기가 의미 있다면 그건 오늘 내가 다시 시작해야할 이유를 그곳에서 찾기 때문일 거다. 우리는 비록 어제의 우리가 아닐지라도.



    테마파크를 나와 합천댐을 지나면서 강 건너 마을에 불이 하나둘 켜진 걸 본다. 눈 내린 작은 마을에 저녁 어스름이 오고 주황빛 불이 켜지는 걸 보며 자신의 둥지를 찾아가는 추운 새의 영혼을 떠올린다. 오늘은 무척 추운 날이다. 눈이 잠시 내렸지만 곧 그쳤고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 시간조차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인사를 한다. 테마파크에 흐르고 있던 시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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