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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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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27) ‘계림시회’ 문인들의 추억 따라 걷는 안민고개

30년 文友, 함께 걷는 문학의 길 함께 넘는 인생고개
57년생 닭띠 시인 모인 시동인 ‘계림시회’

  • 기사입력 : 2016-06-02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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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오래된 만남 -정이경

    산마루에서 만났다는 그들을 보려고

    회치산(會峙山)이거나 해치산을 찾고 있었다

    음력 8월 17일께

    그때 얼싸안고 흘렸을 눈물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보퉁이에서 나온 떡은 또 얼마나 목 메였을까

    (하략)

    안민고개 -김혜연

    보이니

    꽃의 폭설

    발이 빠져

    진저리치는 알몸

    몽유병여자

    거침없이

    바람 달게 핥고 있는



    (하략)

    시루봉 -김일태

    누가 하늘을 높이 키우고 있는지 와서 보라

    가슴을 드러내 놓은 채

    장복 불모 장엄한 허리를 베고 누워

    하늘에 젖 물리고 있는 산이 있다

    (하략)

    안민고개 -이달균

    꽃 지는 날이면 안민고개 가자

    하루 낮 하루 밤이면

    지고 말 꽃이라니

    누이야 화급하다

    헤진 지까다비라도 신고 가자

    인생은 외롭다. 분명 하루하루는 즐거운 일상인데 그 일상이라는 조각을 이어 붙여놓은 인생은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고되다. 그 고단하고 아스라한 인생고개를 함께 넘어가는 글친구들이 있다. 57년생 닭띠 친구로 함께 시 동인을 결성해 활동하는 ‘계림시회’다. 계림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김경식, 김일태, 김혜연, 박우담, 우원곤, 이달균, 이상옥, 이월춘, 정이경, 최영욱 등 10명의 시인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늦봄 소풍에는 계림시회 김일태, 김혜연, 이달균, 정이경 시인이 동행해 안민고개를 함께 걸었다. 스쳐간 봄 벚나무 가지마다 부푼 솜사탕 같은 연분홍 벚꽃이 가득하던 안민고개에 어느새 연초록과 진초록이 어우러진 나뭇잎 물결이 바람에 일렁인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고맙던 어느 오후 그들의 30년 세월을 압축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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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연, 김일태, 이달균, 정이경(왼쪽부터 시계 방향) 시인이 창원시 진해구 안민고개 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이달균 시인이 청바지에 흰 티 입고 제 딴에는 멋을 줬더라고. 첫인상이 그랬어. 근데 자연스레 ‘우리’가 된 지 벌써 30년이 됐어요. 30살에 처음 만나 인생의 절반을 함께했네요. 젊을 때 만나서 그런지 아직도 허물없는 농담을 자주 하곤 합니다. 이름 없이 서로 오가다, 장독에 20년간 묵혀 서로의 흉허물을 다 내줘도 괜찮다 싶어진 10년 전쯤 계림(鷄林)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한 해에 태어나 같은 장르의 문학을 하는 모임이라니, 궁금증이 절로 생긴다는 물음에 김혜연 시인이 답했다.

    “계림이라고 하니까 삼국유사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그냥 닭 띠들이 모였다는 거예요.(웃음)” 이달균 시인이 옆에서 거든다. 딱히 계파가 있거나 동학을 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란다. 그냥 같이 있는 거란다.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이 시인이 잠시 추억에 잠긴다. “우리는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동지의식이 있어요. 동시대를 겪었으니 서로에게 울이 되어줄 수 있는 거죠. 외로움이 시인의 무기가 되긴 하지만, 시를 쓸 때 외에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니 고마울 수밖에요.”

    김일태 시인은 콧대 높고 호기로웠을 젊은 날에도 서로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30년간 문우로, 또 인생의 동반자로 인연을 이어온 그들의 우정 비결은 역시나 ‘시(詩)’였다.

    어투도 성격도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시인 넷이 공통적으로 안민고개를 주제로 시를 짓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안민고개를 떠올리면 우리가 걸어온 길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옛 마산,창원, 진해가 통합돼 지금의 창원시가 된 것처럼 안민고개가 우리한테 그래요. 이곳은 세 지역이 연결되는 길이거든요. 장복산 능선에서 보면 마산의 도심, 창원의 분지, 진해의 바다를 한곳에서 다 볼 수 있잖아요. 만날 수 있는 곳, 연결고리라는 안민고개가 주는 공통된 정서가 있죠. 바라보는 방향마다 풍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이 길이 있어 조화를 이루듯 계림이 그래요. 성격이 다 다르지만 문학이라는 길이 있어 조화를 이뤘기에 불협화음 없이 함께 걸어온 거죠.” 정이경 시인이 찬찬히 설명했다.

    같은 곳을 보고 시를 썼지만 느낌은 사뭇 다르다. 누군가에겐 있고 싶은 곳이고 또 다른 이에겐 잇고 싶은 곳이며 그 누군가에겐 익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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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경 시인은 시집살이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갈 수 있는 친정에 자주 가지 못해 추석 이틀 후 산마루에서 회치(들놀이 혹은 회식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를 기약하던 그 마음을 시에 담았단다. ‘너무 오래된 만남’이라는 제목은 그에 유래했지만 계림 구성원들의 만남의 세월도 이중적으로 포개었다.

    김혜연 시인이 느낀 안민고개는 어떨까. “고개 하면 어렵고 힘든 느낌이 들잖아요, 근데 안민고개는 안 그래요. 고개를 넘으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계절마다 풍경이 다르고 나이마다 느낌이 다르지요.”

    이달균 시인의 ‘안민고개’는 지는 꽃마저 아까워 한달음에 달려가고픈 애틋함이 절로 나고, 김일태 시인의 ‘시루봉’을 읽으면 가까이서 마음에 품었기에 그릴 수 있는 보드라움이 스며 있다.

    마음을 나눌 진짜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림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각자도생의 시대에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외롭지만 외롭지 않게 예순 고개를 함께 넘어가는 친구들이 모였다. 아니 모였다는 표현보다 지금 이 시대, 지금 이곳에서 함께 우여곡절을 나눈다는 게 더 맞겠다.

    시인들에게 안민고개는 늘 품이었다. 나고 자란 땅에 추억을 묻었고 고갯길은 그들이 쓴 글을 온전히 품었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걸었을 그 당시의 안민고개는 울퉁불퉁하고 위태로운 비포장도로였다. 그들 역시 그랬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미완의 서툰 정서와 감성을 고스란히 시에 불어넣었다.

    안민고개의 우거진 나무터널을 차로 달리는 것도 시원스럽지만 고갯길의 참맛을 느끼려면 더디게 걷기를 권한다. 나를 알아주는 이와 넉넉한 길을 걷다 보면 가파른 인생고개에 쉼표 하나 찍을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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