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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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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新팔도유람] 경상북도 칠곡군 ‘한티 가는 길’

누구나 걸을 수 있다… 한국판 ‘산티아고 길’

  • 기사입력 : 2016-10-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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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가끔씩 우린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물음에 마음이 공허로울 때 문득 떠오르는 ‘길’ 하나가 있다.

    경북 칠곡군의 ‘한티 가는 길’이다.

    이 길은 한말(韓末)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요, 순교의 길이다.

    신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연단(鍊鍛)의 길이다.

    그렇다고 이 길이 믿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한적한 교외 숲길은 조용히 걷고 싶은 트레커들에게도 길을 내준다.

    신앙인에게는 경건과 엄숙으로, 트레커들에게는 사색과 음유(吟遊)로 다가선다는

    칠곡 한티 가는 길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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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여행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누구나 한 번쯤 걷기를 소망하는 길이다. 최초 순교자 야고보 성인의 전도 행로를 따라 펼쳐지는 길은 프랑스 남부 생장 피데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진다.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희망한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35일 여정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데다 하루 20km를 걸어야 하는 강한 체력이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길은 연간 600만명의 순례객들을 불러들이며 문화, 관광 비즈니스는 물론 종교,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동안 대구경북에서 산티아고 길을 모티프로 한 순례길을 만들자는 논의는 있어 왔다. 한티 길이 산티아고 길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산악, 종교단체에서 이런저런 계획들이 논의되고 있을 때 먼저 청사진을 꺼내든 건 백선기 칠곡군수였다. 칠곡군은 개청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의 하나로 ‘한티 가는 길’을 계획했다. 2014년 5월에 도·군비 27억원을 들여 착공한 순례길은 지난달 10일 2년 5개월 만에 개통을 했다.

    ▶1구간 가실성당~신나무골 ‘돌아보는 길’= 한티 가는 길 도보에 나서면서 들었던 첫 번째 의문은 출발지가 왜 칠곡 왜관일까였다. 궁금증은 인터넷 검색으로 간단히 풀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경기, 충청의 신자들이 핍박을 피해 남하하면서 왜관 근처에서 은둔하며 공소(신자들의 생활공동체)를 이뤘던 것이다.

    길은 가실성당을 나서며 바로 이어진다. 마을 길. 공장지대를 지나는 초기 구간은 다소 단조롭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숲길로 이어지며 길은 전망쉼터, 바람쉼터를 열며 여행자들의 땀을 씻어준다. 1구간의 하이라이트는 도암지이다. 한적한 시골마을과 노송, 저수지가 3박자로 어우러진 호수는 묘한 감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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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을 모티프로 만든 칠곡군 ‘한티 가는 길’은 신앙인은 물론 일반 트레커들도 한적하게 걷기에 좋다. 가실성당을 출발한 순례객, 트레커들이 ‘바람쉼터’를 향해 오르고 있다./매일신문 김영진 기자/

    ▶2구간 신나무골 성지~창평지 ‘비우는 길’= 신나무골에서 이선이(엘리사벳) 순교 묘소 앞에 서면 누구나 화두 하나를 잡게 된다. 옳다고 여기는 신념과 대상을 위해 과연 얼마나 ‘헌신’할 준비가 돼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예’ ‘아니오’라는 단 한마디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에 순교로써 영원한 자유를 택했던 엘리사벳의 큰 믿음 앞에서 여행객들은 스스로를 비춰 보며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금연, 다이어트 같은 작은 약속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길은 ‘지금 네가 가는 길이 맞느냐’고 묻는다.

    신나무 골을 벗어나면 임도가 나오고 다시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잡목 사이를 걷는 평탄한 임도는 사색에 빠져들기에 좋다. 다소 지루하던 산길은 댓골지를 지나 양떼목장에 이르러 시원한 전망을 펼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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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객들이 도암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3구간 창평지~동명성당 ‘뉘우치는 길’= 한티 가는 길 5구간 전체는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도 아니지만 굳이 최고 경관코스를 들라면 상당수가 3코스를 든다. 정자, 호수, 재(嶺) 등 볼거리가 널려 있고 코스의 변화도 가장 리드미컬하다. 쌀바위, 창평지 전설 같은 스토리텔링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심심찮게 민가와 과수원도 만날 수 있다.

    광주(廣州) 이씨들이 500년 전에 건립했다는 ‘금락정’은 아마 전 구간을 통틀어 최고의 휴식처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코스를 기획한 한티성지 여영환(53) 신부는 “2코스가 ‘순교’라는 묵직한 주제 때문에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머물렀다면 3코스는 호반과 재를 걷고 정자를 감상하는 다양한 테마 코스로 짜여 있다”고 설명했다. 산세가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여 가기 때문에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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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주를 마친 순례객들이 한티성지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한티순교성지/

    ▶4구간 동명성당~진남문 ‘용서의 길’= 긴 호흡으로 길을 열어가던 산길은 동명에 이르러 잠시 호흡을 고른다. 동명성당이 있는 동명면 일대는 19세기 초 상주, 점촌, 영양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일군 곳이다. 신자들은 근처에서 사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궁핍 속에서 믿음을 지켰다. 성당을 나서 5분쯤 걸으면 동명저수지가 나온다. 전체 구간 중에 지나는 4개의 호수 중 가장 크다. 4구간이 개통되면서 그동안 미답지였던 산 아래쪽 산책로가 열렸다. 덕분에 주민들은 수변공원에서 몸을 풀며 호수 일주를 할 수 있게 됐다.

    ▶5구간 진남문~한티성지 ‘사랑의 길’= 진남문을 지나 한티성지에 들어오면 이제 여정은 마무리된다. 한티 길의 전체 테마인 ‘그대, 어디로 가는가’. 100리 길을 걸으면서 이 물음을 수없이 되뇌며 많은 답들을 떠올린다. 37기 묘지 앞에 서면 이런 상념이 더욱 또렷해진다. 이 비석들은 당시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켰던 믿음의 상징이다. 종교를 떠나 모든 여행객들은 지금 걷고 있는 행로에 대해 한 번씩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굽이마다 많은 사연이, 모퉁이마다 박해의 현장이 널려 있지만 길은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외길(One-way)이다. 45.6km 약 20시간의 길, 누구에게는 삶의 전반을 돌아보는 성찰의 길이겠고 누구에게는 믿음을 단련시키는 순례의 길이 될 것이다.

    문의: 칠곡군 농림정책과(☏ 054-979-6501), 한티순교성지(☏ 054-975-5151 숙박, 완주 스탬프 문의), 홈페이지 www.hanti.or.kr.

    매일신문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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