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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아들은 아닙니다- 정둘시(수필가)

  • 기사입력 : 2018-07-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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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김삿갓 문학관의 입구에 자리 잡은 노루목 상회 식당에서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다. 큰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운 넓은 마당, 몇 무리로 나누어 앉은 술상에는 목마른 여행자들의 술잔이 분주하게 오갔다.

    청령포, 장릉을 거쳐 영월 문학기행의 마지막 코스였던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온 우리 일행은 초여름의 더위에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런 터에 계곡 옆의 한적한 주막을 발견하고선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사십 명도 넘는 사람이 일제히 주문을 쏟아낸다. 부자간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사십대 초반쯤의 남자가 정신없이 주문을 받은 후, 술이며 술잔을 나른다. 부엌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께서 주문받은 안주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자리로 음식을 나르던 젊은 남자가 웃음기 띤 얼굴로 핀잔을 준다. 그렇게 숨이 넘어갈 듯 주문을 서두르더니 겨우 막걸리 한 병이냐고. 영락없는 주막집 주인의 행세다. 일행 중 누군가 무안한 듯 말을 건넨다.

    “아드님이신가 봐요.”

    “제가요. 아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제히 눈을 맞추며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은 이 식당의 민박에 머물며 여행을 하는 중이고, 여든이 넘은 노부부가 주인이라고 알려주었다.

    떼 지어 손님이 몰려오자 노부부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팔을 걷어붙인 모양이었다. 우리나 그나 다를 것 없는 입장이었건만, 그것도 모르고 앉아서 이것저것 빨리 가져다 달라고 외치기만 했으니.

    미안한 마음에 술 한 잔을 권했다. 서울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는 그 사람의 얼굴에는 이 골짜기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나이를 초월한 저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지럽게 흩어진 술상마저 자기 일인 양 서슴없이 정리를 하는 그 남자, 들려오는 콧노래 소리에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몇 번이나 뒤돌아보곤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족 이외의 노인들에게 인사는커녕 눈 맞추는 것도 꺼린다. 어디 그 뿐인가. 노인학대의 사례에도 가족이나 친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런 세상에 처음 만난 노부부와 한 식구인 양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했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자 떠나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여행의 의미는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와 영혼까지 감동시키는 경험을 하는 것이리라. 심장까지 푸른 기운을 감돌게 하던 오월의 신록을 한껏 느끼고, 청량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또한 나룻배로만 드나들어야 했던 고립된 청령포의 슬픈 역사에 가슴이 젖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막집 여행객의 천연덕스럽던 그 얼굴만 맴도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둘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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