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사탕 장수의 모자에는 은하수가 박혀있지.
설탕 막대기로 휘저어
시간의 구름을 만들 수 있지.
우리는 구름 먹는 아이들.
오른손에 창을 쥔 반인반마의 괴물들이지.
끝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말의 귀와 발굽을 가진 시간의 자식들을
얼마든지 낳을 수 있지, 설탕만 있다면.
용서해줘,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난폭함. 우리는 그저
별사탕이 가득한 은하수 모자를 쓴
설탕의 아이들이지, 뒷발을 약간 든.
☞ 솜뭉치 같은 구름뭉치 같은 솜사탕, 살그머니 혀를 대면 입안에 퍼지는 달달함과 함께 푹 찌그러져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솜사탕의 낭만과 허무를 시인은 ‘시간의 구름’이라고 상상한다. 이것은 ‘설탕만 있다면’ ‘막대기로 휘저어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고 ‘오른손에 창을 쥔 반인반마의 괴물들이’라고. 신의 전능과 무자비를 흉내 내보다 ‘우리는 그저//별사탕이 가득한 은하수 모자를 쓴//설탕의 아이들이’라고 말을 바꾼다. 말을 바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자식들(구름)’이나 ‘설탕의 아이들(솜사탕)’이나 근원적으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자각을 불러온다. 단맛의 대명사 격인 설탕을 상상의 막대기로 휘저어 ‘오른손에 창을 쥔 반인반마의 괴물’같은 세계를 단내 흥건한 무정형(구름. 솜사탕)의 세계로 해체하고 있는, 상상력이 압권인 이 시 앞에서 “사막(시인)은 어딘가에 샘(상상)을 숨기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 생텍쥐페리의 말에 다시 밑줄을 긋는다. 조은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