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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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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부르는 사람 - 길상호

  • 기사입력 : 2018-09-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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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위에 쓰다 남은 양파 조각들

    아침에 보니 그 잘린 단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거기 모여 있는 벌레들은

    식물의 먼 길 바래다 줄 저승사자,

    검은 날개의 옷을 접고 앉은 그들에게

    칼자국이 만든 마지막 육즙을 대접하며

    양파는 눈을 감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기억을

    날개마다 가만히 올려놓는 중이다

    매웠던 삶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양파는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벗어난다

    벗기려고 애써도 또다시 갇히고 말던

    굴레를 이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에게도 상처가 불러들인 사람 있었다

    그때 왜 나는 붉은 핏방울의 기억을

    숨기려고만 했던 것일까 힘들게 온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혼자

    방문 닫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지금 더욱 난감하게 갇히고 마는 것이다

    속으로 혼자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다

    ☞ 먹어야 사는 존재로서 먹이와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에 그들과 일일이 소통되어서, 그들에겐 사형대 같은 사람의 손아귀에서 고통에 찬 비명소리 애원소리 원망소리를 오롯이 듣게 된다면 마음 약한 사람은 이 세상 대부분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회 부적응자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시인을 ‘천형(天刑) 받은 존재’라고 할 때 ‘천형’이란, 고정관념으로 화석화되어 가는 세계의 각질을 벗겨내기 위해 근원적으로 소통불능의 존재들과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해야만 하는 형벌인지도 모른다. 그것의 전형 같은 이 시는 ‘벗기려고 애써도 또다시 갇히고 말던/굴레를 이제 풀고 있는 것이다’며 칼에 베여 죽음에 이르는 양파에 빗대어 ‘힘들게 온 그에게/술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혼자/방문 닫고 있던 것일까,’ 의문함으로써 결국엔 나 자신과도 소통되지 않는 피조물로서의 근원적 고독에 닿게 된다. 그러므로 ‘속으로 혼자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진형형의 결구는 우리 모두의 현재진형형의 결구가 될 것이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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