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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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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제주도

푸른바다, 꽃, 바람이 마음을 도닥여주는 곳

  • 기사입력 : 2018-10-1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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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약 일주일이라는 짧은 휴식 기간이 주어졌다. 시간은 돈이다. 그런데 돈으로도 시간을 살 수 없는 것이 직장인의 삶이니 돈으로라도 살 수 있을 때 시간을 사라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여행이지! 서둘러 ‘땡처리(?) 항공권’을 검색했다. 많은 목적지들이 떠올랐지만 급히 멀리 떠나기엔 용기도 주머니 사정도 부족했다. 그럴 때는 역시 제주도다. 그렇게 나는 제주로 떠났다. 편도 비행기 티켓과 렌터카 예약. 다른 준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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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물자연휴양림. 비가 내려 수분을 머금은 삼나무 숲길은 더욱 신비로운 모습을 자아낸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숲으로 안내하는 97번 국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아주 천천히 달려야만 했지만 전혀 문제없었다. 이미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고 뜻밖의 휴식시간을 누리는 내 마음에는 여유가 넘쳤으니까.

    도착한 곳은 절물자연휴양림이다. 한껏 수분을 머금은 삼나무 숲길은 신비로운 모습을 자아냈다. 흐린 제주의 날에는 절물이 정답임을 기억해 낸 내가 참 기특했다.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중앙산책로가 끝나면 난이도와 거리에 따라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 부슬비까지 내려 한기가 스미는 와중에 다양한 코스 선택지를 두고 결정 장애까지 겪게 된 상황. 고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작은 암자가 보였다. 암자 한편에는 ‘셀프 카페’가 마련돼 있었다.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안개가 드리워진 고요한 삼나무 숲길을 가만히 걷다 보니 옆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 상대가 됐다. 그는 며칠 전 세무사 자격시험에 떨어졌다고 했다. 나 또한 고시에 도전해 실패한 경험이 있다. 다시 도전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마음을 정리하려고 제주에 왔다는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려오다 멈추게 된 지금 막연하겠지만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앞이 다소 아득해 보여도 그 길은 청춘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중간중간 지친 이에게 따뜻한 차를 권하는 배려와 막막한 마음에 공감하며 위로를 전하는 목소리가 있으니까. 바로 이 휴양림의 산책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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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물자연휴양림.



    ◆내 멋대로 특권= 혼자 떠나는 여행의 묘미는 자유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먹을지 마음대로 정하고 내 멋대로 변덕을 부려도 괜찮다는 것.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를 정해야 했다. 지도 앱을 켜고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했다. 우연히 처음 문의를 한 곳에 예약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숙소마다 별점을 체크하고 후기까지 꼼꼼히 읽어본 뒤 결정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내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먼저 도착한 여행객들로 시끌벅적했다. 주인장은 저녁 파티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바비큐 파티 참여하실 거죠? 2만원입니다.” 당연한 듯 물어보는 주인장의 질문에 얼떨결에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홉 명의 여행객들이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재밌는 것은 그중 일곱 명이 나처럼 퇴사를 하고 이직 전 휴가가 생겨 제주도를 찾은 사람들이었던 것. 심지어 한 명은 싱가포르에서 왔는데 그 또한 새로운 회사 입사를 열흘 정도 앞두고 있다고 했다(다른 외국인 여행객 한 명은 칠레 사람이었는데, 칠레에서 우연히 마시게 된 삼다수 물맛에 반해 제주도에 왔다고!).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입장에 선 사람들이 모여 퇴사하는 아쉬움부터 후련함 그리고 이직의 설렘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제주의 푸른 새벽이 찾아왔다. 아직은 책임질 것이 내 몸 하나뿐이라 내 멋대로 변덕을 부려도, 다른 길을 선택해도, 잠시 우회해도 괜찮은 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이 아니냐며, 치어스(cheers)!

    ◆제주의 꽃과 바람= 초여름 제주도를 방문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제주 수국이다. 이 시기가 되면 탐스러운 수국이 제주 곳곳에서 그 자태를 뽐낸다. 특히 종달리 해안도로 수국 길은 제주의 푸른 바다와 수국을 함께 만날 수 있어 더욱 특별하다. 대신 무척 붐빈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 나는 또 ‘혼여(혼자 여행) 찬스’를 활용해 골목골목을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사람도 없고 수국도 예쁘게 핀 스폿을 찾아 인생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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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제주의 바람 하면 떠오르는 섭지코지. 특별히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제주의 새로운 명소 유민미술관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지난 2017년 6월 문을 열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그의 작품답게 건축물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고민이 건물 곳곳에서 느껴졌다.

    건물 중앙 정원에 억새를 심어 억새 사이사이를 지나는 바람의 소리를 만끽할 수 있게 했고, 현무암으로 쌓아올린 미술관 벽면에는 프레임을 설치하여 유채꽃밭과 성산일출봉을 마치 사각의 액자에 담아 감상하는 것 같은 효과를 줬다. 전시도 훌륭했다. 고(故) 홍진기(1917~1986) 선생이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수집한 프랑스 낭시파(Ecole de Nancy) 유리공예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다양한 기법과 장인적인 솜씨 그리고 창의성이 결합된 유리공예품들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공간은 ‘영감의 방(Inspiration gallery)’이었다. 방바닥에 앉아 낮은 위치에 설치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명상도 할 수 있다. 갤러리 내부의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빛들이 다른 빛깔의 유리를 투영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실 이 미술관 건물은 원래 안도 다다오가 명상 센터로 디자인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방의 분위기가 유독 이 공간과 어울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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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스트 하우스.



    ◆그리고 한라산= 여행의 마지막 날 한라산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등산을 즐기는 편이라 당연한 계획이었다. 한라산 탐방로는 총 일곱 가지다. 대부분 백록담까지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성판악코스를 선호하지만 경사가 완만한 대신 거리가 길어 왕복 8시간이 소요된다. 걷다 보면 조금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번에 내가 선택한 코스는 영실코스였다. 영실코스는 한라산을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산행에서도 병풍바위와 설문대할망의 슬픈 전설이 깃든 오백 장군 바위, 선작지왓에 피어있는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백록담의 남벽까지 끊임없이 눈이 호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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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국.

    내가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전진하는 것 이외의 모든 잡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그리고 넓게 볼 수 있다.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고민들이 별것 아니었던 듯 가벼워진다. 새로운 직장생활을 앞두고 조금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떠나온 여행이었다. ‘면접 때 보였던 그 패기로움 그대로 잘 해낼 수 있을까?’ 잘 해낼 수 있다! 나는 한라산도 가뿐하게 정복했으니까!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나는 아름다운 풍경과 귀한 인연,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용기까지 충전하고 돌아왔다. 그 힘으로 나는 오늘도 출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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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수나

    △1988년 부산 출생

    △ GWU 정치학 전공

    △ 경남메세나협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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