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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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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가야문화 (3) 가야, 일본으로 건너가다

뛰어난 철·토기 기술로 일본 고대국가 탄생 기여

  • 기사입력 : 2018-10-2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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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가야사 연구가 큰 관심을 받고 있지만 가야는 자체적으로 기록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멸망 시기와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가야국이 없어지고 난 뒤 가야인들의 흔적은 곳곳서 나타난다. 통합된 신라나 백제로 간 기록과 함께 일본 열도로 대거 이주한 기록이 발견된다.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침입 등 한반도의 정세로 인해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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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말안장, 가야계갑주, 금동신발 등 일본 오사카현 아스카박물관에 전시 중인 도래인들의 흔적.


    ◆가야 멸망 이유는= 뛰어난 철과 토기 기술을 바탕으로 권역을 확장하던 가야는 왜 사라지게 됐을까? 내부적으로는 여러 소국으로 분리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병력을 한데 모으지 못해 큰 전쟁에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외적인 이유로 외교의 실패가 주요 원인으로 손꼽힌다. 가야는 백제, 왜와 매우 가까웠는데 특히 김해가야 세력은 규슈의 왜 지역에 힘을 지나치게 많이 쏟았다. 가야와 밀접하던 규슈의 왜 왕국이 야마토 정권에 패배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된다. 혼자 힘으로 신라, 백제를 감당하기 힘든 가야는 왜에 지원을 요청하곤 했는데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동맹군으로 삼으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가야에 지원이 어렵게 됐다.

    가야는 400년께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는다. 병력을 추스르던 가야는 554년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 왜 연합군과 함께 신라에 대항했지만 또 크게 패하고 만다. 이후 점점 힘을 잃은 가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삼국사기·창녕진흥왕순수비·일본서기에 당시의 복잡했던 외교 사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항해 독립적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친백제 노선과 친신라 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아라국 왕은 왜를 이용하는 외교전략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532년 가락국(김해), 560년경 아라국(함안), 562년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에 통합돼 가야는 자취를 감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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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시 나가하라 유적에서 발굴된 스에키 토기.

    ◆일본 열도로 이주= 터전을 잃은 가야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야인들 가운데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의 중신으로 최고권력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뛰어난 철과 토기 기술을 갖고 일본 열도로 대거 이주해 일본에서 고대국가가 탄생하는 데 일조한다.

    일본 역사의 시조인 ‘응신’이 가야인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응신이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가 함락됐을 때 당시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민족 대이동을 했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4세기 말까지 일본에는 소와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응신은 일본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가야인들이 일본에 소와 말을 데리고 일본 후쿠오카에 상륙한다. 가야 후손들은 말을 타고 동쪽으로 정복활동을 시작해 오사카에 도달한다. 가와치 왕조를 세우고 150년 동안 지속하다가 한반도 가야가 완전히 멸망한 후 주도권을 백제계인 아스카로 넘겨주게 된다.

    가야는 바다와 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해 왔다. 벽옥제 돌화살촉 (璧玉製石鏃), 바람개비 모양 청동기(巴形銅器) 등은 일본과의 인적 또는 물적 교류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들이다. 또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왜계 유물은 가야에서 생산한 철과 교환된 것으로, 당시 가야가 대외무역의 중개지 역할을 한 근거가 된다.

    당시 일본은 국경 없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따라서 외세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가야인들은 바다를 건너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오랜 기간 교류하고 배척이 없는 일본에 정착하기 원했을 것이다. 일본 오사카 남부에 있는 카쿠니신사 등 카라, 아라, 아야, 가야 등의 이름의 여러 신사들과 고분유적, 유물들을 그 근거로 본다. 가야의 부뚜막 신앙 역시 일본에 전해져 부뚜막형 토기와 부뚜막신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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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아스카 지역 농촌 풍경. 가야인들은 아스카에 뿌리를 내렸다./경남신문DB/

    ◆아스카에 정착한 도래인= 아스카(飛鳥)는 날아온 새라는 뜻으로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을 뜻한다. 아스카 시대(550~710년)는 ‘일본’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때로 당시 왜의 권력을 잡고 있던 야마토 정권의 주 무대인 ‘아스카’지역 이름에서 유래한 나라였다. 현재 나라와 오사카 일대에 걸쳐 있다. 아스카는 한자로 편안할 안(安), 잘 숙(宿)을 써 편안하게 잠잘 곳이라는 뜻이다. 고단한 타국에서 온 이들이 터전을 잡게 돼 이름을 짓게 됐다고 추측된다.

    한반도의 힘을 잃은 국가 지배층들은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떠나갔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일컫는다.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한 결정적 계기로 가야·백제로부터의 문화 전수를 손꼽는다. 아스카에 온 첫 번째 사람은 가야 사람들로 정착 후 토기 등 도래 유물을 전해주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식생활과 부장품 토기 등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즈미(오사카 남부)에 가야 토기와 똑같은 스에키를 굽던 가마가 발견되고 가야계 갑주, 마구 등도 발굴됐다.

    가야를 표현하는 ‘가야(加耶)’, ‘가라(加羅)’에 대한 일본어 표기인 ‘가라(から)’[唐·韓·漢·加羅·加耶·迦羅·伽羅·伽耶]를 일본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본어 내지는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인 또는 외국제 물건’으로 정의돼 있다. 즉 일본인에게 가야인들은 최초의 외국인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나온 출토품을 통해 이 사실을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1984년 1월 13일자 아사히 신문에 “카구야마에 도래인 분묘/일본에선 유례가 없는 토기 다수 발굴/한국 출토품과 같은 종류”라는 머리기사가 났다. 기사에는 ‘나라현 카시하라시 난잔정, 카구야마 남쪽 기슭 유적군 속 고분에서 한국의 남쪽 고대 가야지역에서만 출토되는 기마인물형 토기·딸린굽다리접시모양 토기와 쇠못 등 한국 출토물과 같은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됐다. 이러한 이형(異形) 토기류는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그 구성으로 보아 가야지역에서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도래인의 분묘로 여겨진다. 이 원형 고분은 지름이 18m,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부근에서 9기의 다른 원형 고분도 발견됐다. 도질토기편이 출토됐는데 도질토기는 한국 도기로 이 기술을 가진 도래인들이 일본에서 스에키를 만들었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일본에 남은 가야= 5세기 이후 아스카에서는 한반도를 기원으로 하는 토기나 건물, 온돌 등 도래인의 흔적이 많아졌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도래인 기술자들이 아스카 마을 시마노쇼(島庄, 현재 이시부타이고훈 주변) 부근에 정착했다고 쓰여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은 고온으로 재료를 활용하는 기술을 전파하며 야금 기술과 철제 농구의 대량 생산의 길을 터줬다. 이 밖에도 건축, 야철(冶鐵), 방직, 토기, 문서 작성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해 일본 문화와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아라가야 사람들이 옮겨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흔적도 많다. 일본 열도 곳곳에서 전승되고 있는 ‘아라’ 혹은 ‘아야’와 관련된 여러 지명, 신사 이름들과 오사카와 나라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아라가야계 유물들,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 등에 기록돼 있는 아라가야 계통의 사람들이 그 증거가 된다.

    일본 기비 지방에서도 아라가야와 관련된 많은 지명이 보이는데, ‘안나군’이나 ‘아나군’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교토 동쪽의 거대 호수 비파호(琵琶湖) 남단 시가현에도 아라가야 사람들이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던 아라신사(安羅神社)가 남아 있다. 구사츠역 인근 5㎞ 이내에 아라신사라는 이름을 가진 신사가 무려 3개나 있고 신사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판에는 함안과의 관계가 적혀 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기록, 그리고 전승되는 지명들을 통해 가야인들이 일본 각지에 거주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정민주 기자

    ※ 이 기사는 경남도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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