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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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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인] 고향 하동 ‘기부천사’ 엄상주 복산나이스 명예회장

“기부하며 행복했으니 내가 더 기부 받았지…”

  • 기사입력 : 2018-11-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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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주 복산나이스 명예회장이 자수성가한 과정과 기부에 대한 철학을 밝히고 있다.


    “고향에 작은 발자취라도 남기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엄상주(92) ㈜복산나이스 명예회장은 고향인 하동에서 ‘기부천사’로 불리고 있다. 부산에 살면서 고향을 자주 찾는 그는 자신이 고향을 위해 그동안 해온 기부나 봉사가 자그마한 일이라고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론과의 공식적인 인터뷰도 이번이 처음이다. 조용히 소리 없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푼 봉사에 대해 고향민들이 느끼는 고마움은 작지가 않다. 엄 명예회장을 만나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자수성가한 과정과 기부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청소년기에 일본으로 갔는데 어떤 계기로 가게 됐으며 광복 후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6남1녀 중 다섯째로 자랐는데 일본인 선생에게 배우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에는 일본으로 공부하러 많이 갔는데, 집안이 넉넉한 형편이어서 일본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위에 형님들이 먼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0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 있는 중고등학교 과정인 현립뢰전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귀국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부농도 아닌데다가 일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두 달 만에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서 복산약품을 설립하고 국내 굴지의 약품판매회사로 키우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맨몸으로 부산으로 갔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운크라(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원조 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많이 들어오면서 물자 가운데 약품을 접하게 됐다. 처음에는 원조 약품의 하역을 체크하는 일을 하다가 약품 관련 책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약품 사업을 시작했다.

    국제시장에서 판자를 놓고 약품을 판매하고 자전거로 오토바이로 약품을 배달하다가 1952년 복산약품을 설립했다. 전쟁 중에 사기도 당하고 화재로 재산을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배운 것이 많았다. 사회는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사회 구성원이 서로 신뢰할 수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기더라고 이겨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계기가 됐다. 경영은 미숙했지만 근검절약 정신과 작은 이익 때문에 신의를 저버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성실함이 주변의 도움으로 이어져 재기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고향의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시게 된 계기는.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참 다들 힘들게 살아왔다. 나도 참 바쁘고 힘들게 살아왔다. 어느 정도 회사도 기반이 잡히고 보니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에 다니다 보니 힘들었던 시절에 도와주신 분들의 고마움도 생각나 고향의 어려운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되돌리고자 1994년부터 작은 성의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고생하시는 환경미화원, 산불감시원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체계적으로 후원할 필요성을 느껴 복산약품을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복지회를 만들어 다양한 사람들에게 후원하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지원하고 어떤 보람을 느끼셨는지.

    ▲사랑의 보금자리 제공 사업은 어려운 계층을 후원하던 중 집이 없거나 곧 쓰러져가는 노후주택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몸 하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삶의 희망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지 않겠나 싶은 마음으로 지난 2011년부터 시작했다. 사업 1호는 2011년에 가장을 비롯 3명이 장애를 가져 어렵게 살고 있는 가정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2013년에는 자녀 2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한부모 부자가정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2호 주택을 지어 주었다. 2015년에는 하동군수가 오래된 집의 단칸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가정을 보고 요청을 해와 3호 주택을 건립하는 등 모두 5호의 주택사업을 후원하면서 집이 완성될 때마다 마치 내집 마련한듯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 사업에 2억8600만원을 지원했다.)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인 ‘섬진강 사랑의 집’에 사랑이 각별하신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중풍으로 오랜 세월 동안 거동이 불편했는데 장애인들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나곤 했다. 그러던 중 고향에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 2014년 섬진강 사랑의 집에 연락해 도와줄 것이 없는지를 물어 조금씩 도와준 것이 지금까지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세탁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대형세탁기 5대와 건조기 2대, 장애인들이 조금이나마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식탁과 의자 등의 비품을 사주었다. 매년 하동을 2~3번 방문하면 꼭 들러서 불편한 곳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물리치료장비를 후원하고, 이동 편의를 위해 12인승 그랜드 스타렉스, 6인승 저상형 슬로프 장애인차량 등 다양한 물품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2017년에는 장애인자립체험홈을 건립했다.

    -군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고향 하동에 대한 생각과 향후 계획이 있다면.

    ▲많은 기부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부를 하는 동안 행복했으니 내가 더 많은 기부를 받았다고 본다. 나는 수국이랑 국화를 참 좋아한다. 섬진강 사랑의 집에 사랑의 나눔숲이 있는데 이곳은 공간제약으로 인해 운동량이 부족한 장애인들이 꽃과 나무를 보면서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의 땅을 매입해 기증했더니 하동군에서 나무와 꽃을 심어 숲을 잘 조성했다. 이 나눔숲을 시작으로 하동을 꽃동산으로 만들어 하동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수국을 가꾸며,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차별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도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 내 인생을 마무리 짓고 싶은 최고의 희망은 봉사다. 영원히 남는 것은 기부나 봉사밖에 없다. 고향에 작은 발자취라도 남기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글·사진=김재익 기자 jikim@knnews.co.kr



    ☞ 엄상주 명예회장은?

    1927년 하동군 하동읍 출신으로 하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현립뢰전공업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정경학부 3년을 수료했다. 1952년 부산에서 약품판매회사인 복산약품을 설립해 부산, 서울, 대구 등에 직원 480명의 회사로 성장시켰으며 차남 엄태응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현재 ㈜복산나이스 명예회장으로 있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으로 지난 1972년 모범납세자표창과 새마을운동공로 표창을 비롯해 1973년 석탑산업훈장, 1992년 대통령 표창, 2000년 보건의날 국민포장, 2012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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