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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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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예의- 문성해

  • 기사입력 : 2018-11-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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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깨어 찐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빨갛고 뾰족한 끝이 먼 어둠을 뚫고 횡단한 드릴이었다고

    그 끝에 그만이 켤 수 있는 오 촉의 등이 있다고

    이 팍팍하고 하얀 살이

    검은 흙을 밀어내며 일군 누군가의 평생 살림이었다고

    이것을 캐낸 자리의 깊은 우묵함과

    뻥 뚫린 가슴과

    술렁거리며 그 자리로 흘러내릴 흙들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 가던 붉은 옹고집을

    단숨에 불과 열로 익혀내는 건

    어쩐지 좀 너무하다고

    그래서 이것은

    가슴을 퍽퍽 치고 먹어야 하는 게

    조그만 예의라고 생각한다

    ☞ 대지가 마지막 분단장을 해서 보내준 듯 뿌옇게 흙가루를 뒤집어쓴 채 고요히 누워 있는 11월의 고구마를 보면 손이 먹물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놓은 듯 새까맣게 모지라진 채 흙으로 돌아간 여자가 생각난다. 아무리 씻겨도 씻기지 않던 그녀의 손! 어찌 그녀의 손뿐이겠는가, 이 시의 화자도 ‘새벽에 홀로 깨어 찐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팍팍하고 하얀 살이/검은 흙을 밀어내며 일군 누군가의 평생 살림이었다고’ 가열찬 고구마의 생애를 고구마 특유의 퍽퍽함 때문에 목이 메는 현상으로 치환하여 ‘이것은/가슴을 퍽퍽 치고 먹어야 하는 게/조그만 예의라고’ 사유한다. 사실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궁극이 어머니도 아니고 농부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고 ‘이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 가던 붉은 옹고집’ 덕분임을 생각하면 먹이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가슴을 퍽퍽 치는’ ‘조그만 예의’는 인간만이 취할 수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약육강식 시스템이 밤낮 없이 돌아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새벽에 깨어’ ‘조그만 예의’를 빚어내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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