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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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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가을과 겨울 사이 지리산

산… 산… 산… 난 ‘산뽕’을 제대로 맞아버렸다

  • 기사입력 : 2018-12-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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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창원에서 살고 있는 나는 사실 여기로 이사 온 지 2년도 채 안 된 창원 새내기다.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생긴 몇 가지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예를 들면 배 타고 일본 다녀오기, 다대포에서 서핑 배우기 등등. 그중 하나가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버킷리스트 항목에 체크 표시를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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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과 겨울, 시간의 경계에 솟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

    ▲준비= 천왕봉은 물론이고 지리산을 오르는 것부터 모두 처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점점 쌀쌀해지는 걸 느끼면서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2018년도 전국 단풍 지도를 검색해보니 지리산은 10월 25일경 단풍이 절정일 것이라고 예측되어 있었다. 마침 그 주 주말인 28일 함께하기로 한 친구들과 시간이 맞아 날짜가 정해졌다.

    ▲코스= 지리산은 높이 1915m로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행정구역상 전라남북도와 경남의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 제1호로 그 규모가 국내에서 가장 크다. 그만큼 코스도 다양하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소개된 16개의 코스 중 천왕봉에 이르는 코스 그리고 당일에 소화할 수 있는 코스로 후보를 줄여보니 ‘중산리 칼바위 코스’라는 답이 나왔다. 칼바위라니…. 이름에서부터 악명 높음이 느껴졌다. 등산 장비도 장비지만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회복과 마인드컨트롤이 더 중요했다.

    ▲출발= ‘칼바위 따위 문제없다’ 마인드컨트롤하기도 벅찬데 또 문제가 생겼다.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오른쪽 목과 어깨에 담이 걸린 것이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팔을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내 상태를 확인한 남자친구는 ‘지리산행 절대 불가!’ 원칙을 제시하며 나를 말렸다. 출발 직전까지 고민스러웠다. 가방을 메고 평지를 걷는 것조차 쉽지 않고 못마땅해 할 남자친구의 얼굴도 자꾸 떠올랐지만 포기하기 싫었다. 여름부터 기다려온 지리산이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 4시 30분, 출발을 결심했다.

    ▲꿀팁= 지리산국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에 오를 마무리 채비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쪽에 줄을 서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복장은 등산하러 오신 분들이 맞는데 등산로 입구를 코앞에 두고 줄을 서다니…. 촉이 좋은 친구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확인해보니 중산리 주차장에서 순두류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라고 했다. 이 버스는 원래 산 중턱에 위치한 법계사에 방문하는 신도들을 위해 운행하는 버스인데 지금은 2000원을 내면 일반 등산객도 이용할 수 있다.

    중산리 주차장에서부터 걸으면 천왕봉까지 5.2km, 셔틀버스를 이용해 순두류에서부터 오르면 천왕봉까지 4.8km. 사실 거리상 큰 차이는 없지만 난도 차이가 있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중간에 로타리 대피소에서 합류해 천왕봉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지만 주차장-로타리 대피소 구간의 난도는 어려움이고 순두류-로타리 대피소 구간의 난도는 보통이다. 로타리 대피소-천왕봉 구간의 난도가 매우 어려움이기 때문에 극한 상황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체력을 안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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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단풍.

    ▲단풍=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번 산행의 목표는 천왕봉이었지만 테마는 <단풍 산행>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날짜도 지리산 단풍이 절정기에 이르는 날로 정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산행 하루 전 포털사이트 메인 뉴스를 통해 지리산 천왕봉에 내린 첫눈 소식이 전해졌다. ‘아직 겨우 10월이지만 높이 1915m라면 그럴 수 있는 거겠지…? 아래쪽엔 아직 단풍으로 울긋불긋하겠지?’ 사실이었다. 정말 아래쪽만 울긋불긋했다. 한 500m 정도 걸었을까? 이파리는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나무들이 즐비했다. 고개를 들어 정상 쪽을 쳐다보니 겨울왕국…?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테마 급변경! <10월에 만나는 겨울>. 마음이 급해졌다. 해가 뜨고 얼음이 녹아버리기 전에 빨리 천왕봉으로!!

    ▲등산= 로타리 대피소까지 쉼 없이 걸었다. 법계사 입구를 지나면서 셔틀버스를 운행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잠시 전하고 다시 열심히 산에 올랐다. 중간중간 탁 트인 경관이 펼쳐질 때마다 마음은 급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30초라도 아니 10초라도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도시 근교의 산을 오르는 것도 물론 좋지만 한라산, 지리산처럼 접근이 어려운 산의 가장 큰 매력은 어느 방향으로 내려다봐도 산과 자연만 보인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지나치는 아파트도 높은 빌딩도 도시의 광장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산과 골짜기 그리고 또 산만 보일 뿐이다. 잠시나마 일상적인 것들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그 느낌이 좋다. 새로운 차원에 와 있는 것 같아 무척 황홀하고 상쾌하다. 속된 말이지만 이것을 바로 산뽕(?)이라고 한다. 여기에 중독되면 약도 없다. 계속 오르는 수밖에. 이번에도 나는 산뽕을 제대로 맞아버렸다. 그 신이 나서 담 걸린 어깨의 고통도 잊어버리고 두 팔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그 상쾌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 정상을 향해서! 해가 더 높이 떠오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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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지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천왕봉에 이르는 길은 역시나 고달팠다. 이 계단만 오르면 되겠지 했는데 저 계단이 또 보이고 급경사에 경사 그리고 또 급경사가 이어진다. 안내판에는 이 구간이 매우 어려움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거짓말이다. 매우 매우 매우 어려움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올랐다.

    보통은 여기까지다. 등산의 고통은 끝이 나고 정상에서 뿌듯함을 만끽하고 경치를 감상하며 등산의 고통을 망각하고 도시락을 먹고 가벼워진 배낭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지리산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등산의 고통, 하체로부터의 고통이 끝이 나자 추위의 고통이 몰려왔다. 온몸으로 느끼는 고통! 컵라면 한 그릇으로 잠시 몸을 녹였지만 그뿐이었다. 정상석 옆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려면 약 20분 정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칼바람을 그대로 맞으니 하나님, 부처님,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 생각 나는 모든 어르신들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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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꽃이 핀 지리산.

    ▲상고대= 일반적으로 등산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것이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라면 천왕봉 추위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것은 상고대의 영롱함이었다. 상고대는 영하의 온도에서 급냉각된 미세 물방울들이 나무나 바위의 바람이 부는 쪽에 달라붙어 생기는 얼음이다. 쉽게 말하자면 얼음꽃이다. 덜덜 떨면서 신비롭고 환상적인 상고대의 절경을 넋을 잃고 쳐다봤다. 능선을 기준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만 상고대가 선명하게 피어 있어 반대쪽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가을과 겨울이라는 시간의 경계에 내가 서있는 것 같아 신기했다.

    ▲지금이다= 무사히 천왕봉을 정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지리산행 절대 불가’ 원칙을 고수했던 남자친구를 만났다. 걱정 반 괘씸 반의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 것이 느껴져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다시 그와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 미안함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결국 지리산에 오를 것 같다. 지금이 아니었다면 결국 천왕봉은 내년의 버킷리스트에 다시 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었다면 다시 따뜻해진 날씨에 상고대의 영롱함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지리산의 신비로움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인 줄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시기를 완전히 놓치고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 진짜 늦었다’는 유명 코미디언의 말장난으로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곤 한다. 앞으로 그럴 때마다 나는 지리산 천왕봉을 떠올릴 것이다. 망설이고 미루지 말자, 지금이다. 늦지 않았다. 바로, 지금이다. 고집스러운 나를 만나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남자친구에게는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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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수나

    △1988년 부산 출생

    △ GWU 정치학 전공

    △ 경남메세나협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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