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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문학소녀, 항일독립여성운동가 박차정 의사- 이윤(시인)

  • 기사입력 : 2018-12-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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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가을, 지역 문학지 특집기획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다’란 주제로 집필을 맡게 됐다. 자료 준비에 고민 중, 박차정 의사 후손 박의영 목사가 부산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지병으로 투병 중인 후손을 두 달간 기다리다 얼마 전에 만났다.

    박차정 의사는 유관순 열사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로 짧지만 불꽃 같았던 그의 삶은 해방에 크나큰 밑거름이 됐다.

    박차정 의사는 문학소녀였다. 그러나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문학소녀는 애국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학적 감수성을 깨운 습작시 ‘개구리 소래’를 소개한다.

    천궁(天宮)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우리 집 뒤에 있는 논 가운데는/ 뭇 개구리 소리마춰 노래합니다/ 내 기억의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 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떠러집니다/ 미지의 나라로 떠나신 언니/ 개구리 소리 듣기 좋아 하더니/ 개구리는 노래 하것만/ 언니는 이 소리 듣지 못하고 어디 갔을까 -개구리 소래-

    이 시는 문학소녀 박차정이 동래일신여학교 시절에 교우지 ‘일신’ 2집에 실은 시로 일찍 죽은 언니를 추모하는 노래다.

    박차정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부모와 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 숙부 박일형, 외가 등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영화 ‘암살’에서 김구 선생이 김원봉에게 했던 말이 있다. “결혼식에 못 가 미안하다.” 그 결혼식이 바로 김원봉 선생과 박차정 의사의 결혼식이다. 개구리 소리에도 애달파하던 동래의 문학소녀 박차정과 톨스토이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즐기던 김원봉은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결혼 이후 이들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이념적 동지로 함께한다. 박차정 의사는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활약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 낫지 않고 후유증이 도져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34살의 아까운 나이로 중경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되었다. 지난 2001년 3월에 부산 금정구에 동상이 세워졌고, 2005년 7월엔 동래구 칠산동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총을 든 독립군 박차정 의사!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식민지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박차정은 ‘암살’의 여주인공 여자 저격수처럼 목숨을 바쳐 항일운동을 벌였다.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부산에 있어도 여전히 박차정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역사를 잊은 나라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여성으로서의 꽃다운 나이에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며 살아야 할 시기에 시대적인 고난의 삶 속에서 몸부림친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삶의 가시밭길을 가냘픈 여성이지만 힘차게 헤쳐나간 것을 보게 된다. 황량한 대륙의 정신만이 그녀에게 가득했기 때문이리라. 또한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그녀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녀를 민족해방주의자, 여성해방주의자라고 한다. 그런 정신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녀가 자란 가정과 학교와 주위의 배경 때문이라 하겠다.

    이 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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