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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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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어느 수학교사 시인의 비애-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9-01-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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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수학교사’이면서 ‘시인’이고 ‘문학평론가’이다. 사석에서 이렇게 소개를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이때 그들의 질문방식은 대개 이렇다. ‘어떻게 수학선생님이 시를 쓰고 평론을 해요?’

    물론 이 질문의 이면에는 ‘수학과 문학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수학과 문학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떻게 시를 쓰고 평론하는 사람이 수학을 가르쳐요?’ 이렇게 묻지는 않는다는 거다. 같은 말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많이 다르다. 나를 수학교사로 보느냐, 아니면 시인이나 평론가로 보느냐에 따라 그 자리에서 나의 역할과 위상은 달라진다. 물론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먼저 나의 정체성을 수학교사로 규정했을 경우. 나의 발언과 행동은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저마다의 선입견에 바탕을 두고, 학창시절 겪었을 법한 수학선생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위에 내 이미지가 겹쳐진다.

    그들은 그 자리의 나를 학창시절의 수학선생님과 동일시한 채 추억놀이나 한풀이의 방편으로 기꺼이 소비한다.

    누군가가 ‘수학이 제일 힘들었어’ 혹은 ‘수학이 젤로 싫었어’ 하면 이구동성으로 복창하며 동의하고, 수학에 대한 증오와 규탄으로 그들은 연대하고 규합한다. 그러면서 술좌석은 갑자기 수학이 매개가 되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때 눈치 없는 누군가가 ‘나는 수학 시간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하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왕따의 수모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 만큼 수학교사가 시를 쓰거나 평론한다고 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기하학처럼 딱딱하고, 대수학처럼 난해하고, 해석학처럼 헷갈릴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오랜 시간 내 문학은 사람들의 수학에 대한 편견과 횡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음은 나의 정체성을 시인이나 평론가로 규정했을 경우. 이 경우는 주위의 반응이 꽤나 복잡하다. 일단 비문학인들의 모임에서라면 ‘매우 특이한 사람’이라는 듯이 바라본다. 시인이 수학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호기심과 시인이 수학을 제대로 가르치기나 할까 하는 의구심이 뒤섞여 있다.

    만일 그 자리가 문학인들의 모임이라면 나는 꽤 유능하면서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능’과 ‘재주’는, 예술로서의 문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라면 썩 유쾌한 수식어가 아니다. 문학에 목을 매는 절실함과 절박함, 그 길에 매진하겠다는 우직함이 결여되었거나 결핍된, 그래서 ‘여유 있는 자의 고상한 취미생활’ 쯤으로 내 문학이 치부되기 때문이다. “글 안 써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어요.”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순간 나는 그 자리를 뜨든지, 내가 문학을 얼마나 깊이 신앙하며 심지어 문학에 순교할 각오로 임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앞의 경우든 뒤의 경우든 내 문학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수학교사라는 걸 숨기게 되었고, 작품을 발표할 때 덧붙이는 작가의 약력에 ‘수학교사’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게 되었다. 가장 소중한 생업을 지운 내 ‘약력’이 과연 나의 ‘이력’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해가 밝았다. 무슨 다짐이나 기원을 해야 한다면 나는 이것을 기원하고 싶다. ‘올해는 내가 나로서 떳떳할 수 있게 하소서!’ 얼치기 ‘수학-시인’인 나의 소망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숨김으로써 드러내야 하는 많은 분들께 드리는 기원이다. 올해는 부디 진면목(眞面目)으로 사시기를.

    김남호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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