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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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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끌림, 그리고 떨림- 이주언(시인)

  • 기사입력 : 2019-03-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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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년 전, 진주에서 1년 정도 산 적이 있다. 그때의 내 생활은 우울 자체였다.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근처 대학의 도서관을 드나든 것 외에 딱히 갈 데가 없었고 사람을 거의 사귀지도 못했다. 문화센터 같은 것도 흔치 않을 때였다. 그런데 아파트 앞에 있던 성당이 내 눈길을 끌었다. 어느 날 나는 무작정 성당으로 들어가, 어떻게 하면 성당엘 다닐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작은 ‘끌림’으로 시작된 나의 종교생활은 창원에 와서도 몇 년 동안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 쉬게 됐다.

    3년 전에 엄마의 죽음을 앞두고 다시 성당을 찾았다.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고, 기도 속에서 위안을 얻고자 했다. 다시 시작하는 종교생활이 흐지부지될까 걱정됐지만 오히려 이번 성당에서는 나의 정성과 믿음에 비해 과분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중의 한 예가 ‘독서’다.

    미사 시간에는 신부님의 주도 하에 여러 가지 전례 의식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신자 한 사람이 제단에 올라가 성서의 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독서’다.

    다른 신자들은 가만히 눈 감고 듣거나, 내용을 눈으로 따라 읽으며 성서 말씀에 집중한다. 그런데 문제는 ‘독서’ 시간이 되면 많이 긴장된다는 점이다. 무대에서 시낭송을 하거나 학교 강의를 할 때는 담담한데, 글을 반 페이지 정도 소리 내어 읽는 ‘독서’ 시간에는 유독 ‘떨림’에 많이 포섭된다. 왜일까? 신이라는 존재 앞에서 나 스스로가 하염없이 작게 느껴져서일까, 나만 이런 것일까, 부끄럽고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함과 동시에 긴장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는 ‘끌림’이라 할 수 있다. 긴장이 없어지면 사랑도 식듯이 ‘떨림’이 없으면 ‘끌림’도 빛을 잃는가 보다. ‘떨림’ 없는 ‘끌림’이었기에 이전에 내가 성당을 쉬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불편하지만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끌림’을 유지시켜 주는 것 같다. 제단에서 나를 ‘떨림’에 들게 하는 어떤 기운을 느끼며 나는 겸손해진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일이다.

    이주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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