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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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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581) 제24화 마법의 돌 81

“비가 와서 단풍이 더욱 좋아요”

  • 기사입력 : 2019-05-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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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놋그릇을 강제로 공출해 갔다. 쌀도 대대적으로 실어갔다. 조선의 쌀들이 일본군의 군량으로 소모되었다. 조선인들은 굶주리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물자가 부족하자 배급제가 실시되었다.

    1943년이 지나고 1944년이 되자 방공훈련까지 실시되었다. 곳곳에 방공호를 파고 사이렌이 불면 방공호로 대피했다. 미국 폭격기가 조선까지 폭격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아 뒤숭숭했다.

    ‘그릇까지 강제로 빼앗아 가다니….’

    놋그릇은 탄환을 비롯하여 각종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했다.

    이재영이 나츠코를 다시 만난 것은 그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가을이었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데 단풍이 붉었다. 이재영은 웬일인지 가슴 속이 허전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는데 대구역에서 나츠코가 전화를 걸어왔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네.’

    이재영은 나츠코의 얼굴을 떠올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전쟁으로 우울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재영은 나츠코와 함께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는 신라 유적이 많았지만 이재영도 가 본 일이 없었다.

    “조선은 가을이 아름답네요.”

    나츠코가 차창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경주는 더 아름답다고 그래요.”

    이재영은 나츠코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차창으로 붉게 물든 단풍이 지나갔다.

    “비가 와서 단풍이 더욱 좋아요.”

    “비에 씻기니까… 조선에서는 선연(鮮然)하다고 그래요. 산뜻하고 밝다는 뜻이죠.”

    “그래요?”

    “그런데 선연(鮮姸)하다는 산뜻하고 아름답다는 뜻이에요.”

    “산뜻하고 밝고… 산뜻하고 아름답고….”

    “선연(鮮娟)하다는 곱고 아름답다는 뜻이지요. 선연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이 있어요.”

    “호호호. 재미있네요.”“밖으로 나오니 한결 기분이 좋은 것 같소.”

    “여자랑 같이 있어서 좋은 게 아니고요?”

    “맞소. 여자와 함께 있어서 좋소.”

    이재영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임자가 있는 여자….”

    나츠코가 하얗게 웃었다. 나츠코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금단의 열매를 더 좋아한다. 나츠코에게 남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만나는 것은 금단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나츠코가 이재영에게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이재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기차가 쉬지 않고 시골 단풍 사이로 달렸다.

    이내 기차가 경주역에 닿았다. 경주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재영이 우산을 들고 나츠코가 팔짱을 끼었다. 전쟁 중이라 관광지로 유명한 경주도 침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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