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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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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주인처럼 나그네처럼- 김태희(실학박물관장)

  • 기사입력 : 2020-02-18 20: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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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준(1712~1781)의 〈도로고(道路考)〉 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은 머묾이 있고 다님이 있다. 머무는 것은 집에서 머물고, 다니는 것은 길에서 다닌다. … 길의 중요함은 집의 중요함과 대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집은 자신이 홀로 있는 곳이요, 길은 남들이 함께 하는 곳이다. 백성들이 집에는 공을 들이지만, 길은 소홀히 한다.”

    길이 집만큼이나 중요한데도, 집은 잘 챙기면서 함께 쓰는 길은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길이 주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길은 정치하는 사람이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글의 맥락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은 몇 가지 생각을 더하게 한다.

    먼저 ‘길’에 대한 생각이다.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다. 길이란 사람들이 다녀서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길이 유지된다. 길이란 본디 독점과는 거리가 멀다. 길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만약 길의 본래 속성과 다르게, 어떤 길이 누군가의 독점에 의해 막힌다면 다른 길이 열릴 것이다.

    길의 가치는 어떻게 쓰는가에 달렸다. 곧 쓰는 사람에 달렸다. 같은 길이라도 교역과 평화의 길일 때가 있는가 하면, 재앙과 전쟁의 길이 될 때도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평소 열려 있던 길에 여러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길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길이란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통하여 있는 것이 바람직한 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길에 주인이 없어 길이 잘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신경준의 지적이 흥미롭다. 마치 공공재의 비극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든 사안이든 주인과 손님, 또는 주인과 노예의 태도가 같을 수 없다. 일하는 에너지도 일의 성과도 다르다. 그래서 일터에서는 일하는 자신을 위해, 일의 성취를 위해 ‘주인의식’을 강조하곤 한다.

    길을 향유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지더라도, 길을 관리하는 것은 공동체적 노력이 요구된다. 신경준의 글은 도로 관리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길은 주인이 없어 누구나 주인처럼 향유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인용되기도 한다. 길을 개인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지만, 길의 본래 용도에 따라 이용하는 것은 누구나 주인처럼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인의식’이란 게 반드시 좋은 면만 있을까. 혹시 과도한 집착과 독점욕 현상이 지나친 ‘주인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주인이란 것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건전하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이 자식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떤 집과 관련해서 집문서를 조사해본 적이 있는데, 집 주인이 자주 바뀌는 게 참으로 무상하더라는 것이다. 소유란 것이 그다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얘기였다. 소유뿐이 아니다. 머묾이란 것도 영원할 수가 없다. 그것 또한 지나가는 것이다. 다만 길고 짧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인이란 지위는 한시적이다. 인간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세상사가 모두 지나가는 것이란 생각이 많이 든다. 시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집주인도 잠시 묵게 된 손님도, 모두 ‘지나가는 사람’이다. 단지 머무는 시간이 다르고, 향유하는 공간 영역이 다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이 허망한 것일 수 없다. 세상에 덧없지 않는 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결국 지나가는 것이다. 오히려 짧게 지나갈수록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으로 또는 주인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더라도, 한편으론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는 게 낫다. 아니, 거꾸로 생각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나는 잠시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지만, 그동안은 주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인으로서 향유하되, 곧 비워줄 것을 준비하면서.

    김태희(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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