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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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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출신 독립운동가… 보고 겪은 고문 내용 그림으로 남겨

괴암 김주석 선생은 누구

  • 기사입력 : 2020-08-14 08: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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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죽고 대원이 다 희생되어도 왜놈 네놈은 언제가는 멀지 않아 천벌을 받아 망하고 말 것이다. 두고 보아라, 약소민족의 혼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괴암 김주석 선생 자서전 내용 일부)

    진해 경화동 출신 김주석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미술전문학교의 입학을 원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서울 경성전기학교(현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로 가게 됐다.

    선생이 항일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그의 자서전과 강미선 김주석기념사업회 전 사무국장의 논문 등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해당 문건 등에 따르면 선생이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중 학교 명치절 기념 행사에서 기념사를 하던 중 누군가가 웃는 일이 생겼다. 일본인 교련 교관이 웃은 학생을 잡아내기 위해 민족차별적 발언 등을 했고, 이 일로 분노한 학생들이 다음 날 기숙사로 교관을 유인하고 구타해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학생 간부 몇 명이 투옥·퇴학·무기정학을 당했다. 김주석 선생 또한 간부였지만 하급생이라는 이유로 정학처분을 받고 일주일 만에 헌병대에서 풀려났다.


    선생은 교관 사건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을 벌이는 등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때마침 이웃에 하숙을 하고 있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독립운동을 하는 이일전을 알게 되면서 뜻을 함께할 동료들과 1943년 학우동인회를 결성했다. 대원들은 모두 8명이었으며 이일전이 회장을 맡았다. 이들은 우리말 사용과 계몽·창씨개명 반대·위안부 동원 반대 등 혈서로 공약을 맹세했으며, 조선총독과 일본 고위관리 및 정치인 암살 등을 계획했다.


    동인회 결성 1년 만인 1944년 동인회 대원이었던 이응태가 일본헌병들의 수배를 피해 고향인 진해로 몸을 피하던 중 진해 경화극장 앞에서 진해 헌병의 불심검문을 받고 체포당한다. 이때 이응태가 심한 고문 끝에 학우동인회에 대해 실토하면서 대원 전원이 체포돼 헌병대에 끌려가게 된다. 선생은 서울 헌병대에서 2주일간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진해헌병대로 압송됐다.

    김주석 선생은 옥고를 치렀던 진해헌병대를 가리켜 ‘그곳은 지옥이었다’고 회상할 만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진해헌병대에서의 4개월 동안 사상범들에게 행해진 고문 등 악행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겼다.


    김주석의 기록물에는 다양한 고문종류와 고문도구를 그려놓았는데 살펴보면 각목으로 무릎 사이에 끼워 누르는 방법, 시체 넣는 관 안에 눕게 하여 수돗물을 넣어 실신시키는 방법, 손가락 사이에 막대, 펜대를 꼽아 압축하는 방법, 손톱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방법, 손톱 끝에 뚫린 구멍에 노끈을 비벼 넣어서 빙빙 돌리는 방법, 양 팔을 등 뒤로 넘겨 억지로 묶어서 매달아 놓는 방법, 주전자에 물을 담아서 입, 코로 부어서 질식시키는 방법, 가죽으로 만든 끈으로 맨몸 때리기, 빨갛게 달군 철근으로 피부 지지기, 거꾸로 매달아 때리기, 관에 산채로 매장시키기, 의자에 앉혀 묶고 전기 고문하기 외에 도구 사용 없이 고문하는 방법에는 잠을 못 자게 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을 접한 김주석 선생은 감격해 일본 국기에 먹칠을 하고 태극기를 그리고 대문에 걸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모르는 이웃들이 집집마다 걸 수 있도록 태극기 그리는 법을 적어서 길거리에 여러 군데 붙이기도 했다.

    선생은 해방 다음 날 일본인들이 살았던 시가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의 집에 무작정 들어가서 강제로 물건들을 강탈하거나 빈집에 문패를 제멋대로 달고 주인처럼 행세하는 등의 모습을 보고 실망과 좌절을 겪었다.

    이에 그는 1946년 5월 교육에 뜻을 품고 그해 8월 초등학교 교원 3종 시험에 합격, 다음 해에는 경상남도 중등미술과 검정고시에 합격해 도내 초·중·고등학교에서 약 46년간 미술을 가르쳤다.


    김주석 선생은 석방 이후 계속해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학교 퇴직 후에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하반신 장애인으로 생활하다가 66세에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갖고 일본에 맞서 온몸으로 투쟁하며 살아온 김주석 선생이지만, 그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는 가정에서나 교단에서 한 차례도 독립운동이나 헌병대에서 겪은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주석 선생의 큰 사위인 김진태 김주석기념사업회 부회장은 “김주석 선생님은 본인이 아프거나 괴로운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던 분이다. 나의 아내(김주석 선생의 장녀)는 선생님을 언제나 밝고 자상했던 아버지로 기억했다”면서 “지난 2016년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선생님의 자서전을 발견했고, 그제서야 선생님이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고 전했다.

    김주석 선생의 제자들 역시 이 사실을 뒤늦게 접했다. 2016년 3월 14일 전점석 전 창원YMCA사무총장이 진해도서관에서 황정덕 선생의 저서 ‘진해 항일운동사’에서 김주석 선생의 고문 그림을 발견해 선생의 제자들을 만나 전해준 것이다.

    2016년 12월 선생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유족, 지인 등이 모여 (사)김주석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이들은 선생이 기록한 친필 수기, 자서전 등을 바탕으로 자료와 증거들을 모아 세상에 소개하는 등 2018년 8월 15일 선생이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받는데 기여했다. 이한얼 기자

    이한얼 기자 leeh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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