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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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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십만단풍설-율곡 이이’ - 오영민

  • 기사입력 : 2020-11-12 0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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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이 오기도 전 예비 된 십만 단풍

    화석정 앞에 두고 노을 먼저 짙었는데

    어쩐지 늦여름 밤은 모를 것만 같았다

    껍질마다 서리처럼 사과즙이 내리던 날

    속수무책 불 싸지른 가을 앞에 무너지는

    늦여름 신음 소리가 말굽인 양 다급했다

    고삐 놓아 도망하는 그들의 행렬 뒤로

    산과 들이 북을 때려 등 밝히는 눈빛들

    일십만 정예 단풍의 빼든 칼이 삼엄하다


    ☞ 절정의 가을은 웅장함의 극치입니다. 십만 대군과 충정으로 뛰어내리는 아름답고 거대한 초절정의 문장입니다. 읽을수록 장엄한 뜨거움이 단풍 핏물로 스며듭니다.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새기고, 명치 끝에서 몇 바퀴 돌려서, 다시 세상에 내뱉으며 써 내려가는 결기의 문장입니다. 서녘 노을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말발굽의 행렬입니다. 차근차근 곱씹어 읽게 만드는 오영민 시인의 시조 ‘십만단풍설’을 만나 매우 기쁩니다. 좋은 시조는 오래 두고 읽어도 그 맛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숙성이 더해져서 진한 향기로 머금어집니다.

    이 작품은 발표한 지 꽤 오래된 작품입니다. 율과 율 사이 긴장감도 탁월하거니와 각 장과 장 사이 음폭이 매우 커서 읽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얼얼하게 만듭니다. ‘일십만 정예 단풍의 빼든 칼이 삼엄’할 정도로 독자의 심장을 도려내는 화룡점정의 문장입니다. ‘감탄사’라는 것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조를 읽어내는 독자들의 마음이 문득 궁금해져 일일이 행간 설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다양한 형용사와 다양한 감탄사를 가진 독자의 마음을 통째로 사렵니다. 화석정 율곡 이이의 충정을 아로새기며 이 가을을 보내고 군불처럼 오는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렵니다. 임성구(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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