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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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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시간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김향지(소설가)

  • 기사입력 : 2021-01-28 20: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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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많던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냈던 시간의 행방이 묘연하다. 내게 주어졌던 시간은 존재하기나 했을까? 흘러간 시간은 어디에 집적되어 있는가?

    “시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질문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런 겹치는 질문을 한 이가 있었으니,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년)였다. 그도 이즈음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던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날 마주하게 된 시간에 대한 당혹감을 고백록(Confessiones)을 통해 진전시켜 나간다. ‘고백록’ 제11권에서 누군가가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기 전에는 시간을 알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난처해한다. 이렇게 해서 저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논증이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데 시간은 존재하는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후속 질문을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아포리아를 해결해 나간다.

    시간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해 기대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며, 시간 약속을 정하기도 한다. 흘러가버린다고 해서 무(無)는 아니다. 시간은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는 직관으로 미래는 기대로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는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만 인식할 수 있다. 시간은 항상 지나간 것의 현재, 현재적인 것의 현재, 그리고 다가올 것의 현재인 세 겹의 현재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정신 속에 존재하는 시간들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과거의 사건들은 우리들의 정신 안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 흔적들을 통해 정신은 기억하고 기대하기도 한다. 기억과 기대로 팽창된 정신을 통해 시간은 측정할 수 있다며 논증을 끝낸다.

    그런데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은 새로운 시간의 아포리아를 끌어들인다. 서사 해석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년)는 ‘시간과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 매우 진보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우주론적 시간을 심리적인 것으로 완전히 대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리쾨르는 시간성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이야기 기능’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의 시간 경험을 이야기로 재구성할 때 그것은 비로소 인간의 시간이 된다. 인간의 시간 경험은 미메시스(mimesis)를 통해 재구성된다. 미메시스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플롯(plot)에 의해 이상화된 모방을 말한다. 플롯은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이질적인 경험들을 질서 있게 구조화시킨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 구조화된 이야기는 존재와 시간의 비밀을 간직한 ‘시간의 파수꾼’이 된다. 텍스트가 된 이야기는 해석을 기다린다.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세계와 인간을 해석하게 되고, 거기서 결국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자아를 성장시켜 나가는 통로가 된다. 삼중의 미메시스 즉, 시간 경험의 단계, 이야기의 단계, 독자의 단계를 거쳐 해석학적 순환을 이룬다. 이 해석학적 순환은 시간의 큰 그림인가? 이야기의 큰 그림인가?

    나를 관통했던 시간들은 이야기가 되기 위해 신호대기 중이다.

    김향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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