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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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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새로 쓴 ‘보물섬 남해’ 3·1독립만세운동 비사- 김정일(남해항일운동사 집필위원)

  • 기사입력 : 2021-03-01 19: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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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마다 3·1절이 다가오면, 암울했던 일제저항기의 독립투사들이 떠오른다. 역사적 진실은 미화시켜서도 왜곡되어서도 안 된다. 왜곡된 역사는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동안 남해 3·1독립운동은 기미년 4월 2일 이예모가 하동군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동지를 규합, 4월 3일 오후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궐기를 시작해 남해읍으로 향하던 도중에 고현면장 김치관의 밀고로 좌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월 3일의 기록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기미년 대한독립만세사건 재판소 판결문’에는 이예모와 유찬숙에 대해 ‘4월 2일 밤 남양리 설천면 문항리 노상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위해서 치안을 방해한 자들’이라는 판결을 했다. 따라서 남해군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4월 3일이 아니라 4월 2일이다.

    남해군은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종전과 달리 독립유공자 정임춘 선생의 손자 정성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하미자 남해문화원장은 경과보고에서 당시 주역 17명을 일일이 호명했다.

    장충남 남해군수는 기념사에서, 우리 남해도 그해 4월 2일 동학정신을 이어 받은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천면 문항에서 면민 100여명이 남양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틀 뒤인 4일에는 남해시장에서 각 면의 장꾼들까지 가세한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했다.

    남해 3·1만세운동사를 새롭게 기록한 원년이었다.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소장 박성석)가 남해독립운동사 편찬을 위해 자료 수집 중 지난 1월 3·1운동 주역이었던 정몽호 선생의 활동상황과 옥고 담을 직접 써서 남긴 육필원고를 입수했다. 남해읍 남산 3·1만세 기념비건립 공동회장 중 한 분인 정재홍 선생 육필원고(복사본)도 추가됐다. 새로 쓰는 남해 3·1독립만세 운동사에 보물 같은 자료다.

    남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하순 정임춘 외가 친척 이예모에게 천도교 진주교구로부터 남해군도 이에 호응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제일 먼저 정임춘을 찾았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정임춘은 지금 문항마을회관 자리에 있었던 한문서당인 문항강명제를 찾아가 이 서당 출신인 문항마을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등을 불렀다. 한학선생 정상기 선생과 함께 숙의한 후 전원이 동참할 것을 다짐했다.

    4월 2일 오후 6시 문항리 솥곡 신작로에서 그들을 주축으로, 설천면민 100여명이 집결해 목청껏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남해군 독립만세운동의 발단이 된 것이다.

    김정일(남해항일운동사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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