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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우암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 기사입력 : 2022-03-04 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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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재 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사주명리·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mail : ju4614@naver.com)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져 1635년에 봉림대군(후일의 효종)의 사부로 임명됐으며 효종이 등극한 후에도 깊은 유대를 맺게 됐다. 하지만 서인에서 분파한 노론의 영수로 있으면서 고질적인 당파싸움에서 화해보다는 분쟁의 주도자가 되어 원성을 많이 샀으며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의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정치가이자 학자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문장과 서체에 뛰어나 비(碑·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갈(碣·지붕돌이 없는 둥그스름한 머리 부분을 둔 비석), 지문(誌文·죽은 자의 이름·태어나고 죽은 날·행적·무덤의 위치와 좌향 따위를 적은 글) 등 묘문(墓文·묘비나 묘표에 쓴 글)에 명성이 자자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효종릉의 지문)은 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대전 동구 소제동에 주자학의 대가로 알려진 송시열이 1653년(효종 4)에 지어 55세가 되는 1661년(현종 7)까지 거주한 ‘송자고택(宋子古宅)’이 있다.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의 좁은 골목 안에 위치한 고택은 성동산의 지맥이 뻗은 생기(生氣)를 머금은 곳이며 주건물과 좌우측에 있는 보조건물이 ‘ㄷ’자 형상으로 좌청룡과 우백호 역할을 함으로써 외부의 흉풍(凶風)과 살기(殺氣)를 막아주고 있다. 게다가 남서쪽의 대동천이 지기(地氣·땅 기운)가 빠져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고, 남동쪽의 동중앙로는 고택을 감싸고 있음으로써 수맥이나 돌무더기가 없는 안온한 기운이 감도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고택 내부는 방보다 더 넓은 우물마루가 있어, 강학공간으로 사용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주자의 학설을 끊임없이 계승, 발전시키려는 학자의 굳은 신념을 보는 듯하다.

    1689년 6월 왕세자(숙의 장씨의 아들로 후일의 경종)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충청북도 괴산군에 우암 송시열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영조 33년(1757)에 현 장소로 이장했다. 묘소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정조의 어필로 정조 3년(1779)에 세운 것으로 국난이 있을 때에는 땀을 흘리는 신비로운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주산(뒷산)인 매봉산에서 뻗어 내려온 지맥이 우선룡(右旋龍·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간 산줄기)이다가 묘 바로 위에서 좌선용(左旋龍·왼쪽으로 돌아 내려간 산줄기)으로 진행하면서 좌우요동과 상하기복을 거쳐 송시열의 묘에 기운이 응집되었으나 정확한 혈처(穴處·혈이 맺힌 곳으로 명당을 뜻함)는 상석에서 묘 앞 1/3 지점까지이다.

    하지만 이처럼 용맥(龍脈·산줄기)이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머물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음택(陰宅·무덤을 지칭)도 대단히 드물다. 좌청룡과 우백호는 약한 편이나 빽빽하게 심은 나무들이 대체하고 있고, 안산 또한 부실하지만 나무로 갈음하고 있어 흉풍과 살기를 막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산의 근본을 갖추었기에 가능한데, 만일 근본이 없다면 ‘산무조악래(山無祖惡來·산의 묏자리가 근본 뿌리가 없다면 악함이 온다)’가 되어 대단히 흉하게 된다. 매봉산과 구룡천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추게 했다. 비록 외청룡과 외백호가 묘를 감싸지 않고 무정하게 뻗었지만 구룡천이 대신 감싸고 있다. 묘 아래쪽에는 물이 모였다가 빠져나가는데, 물은 묘의 땅심을 강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풍(藏風·세찬 바람을 막음)은 부족하나 득수(得水·물을 얻음)가 되기에 송시열의 묘는 길지(吉地)가 되었다. 이를 풍수지법 득수위상 장풍차지(風水之法 得水爲上 藏風次之)’라 하여 ‘풍수의 법에 물을 얻음이 첫째요, 장풍의 보국은 다음이다’라고 한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사주명리·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mail : ju46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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