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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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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그 겨울의 시- 박노해

  • 기사입력 : 2023-01-05 14: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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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 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 인디언들은 12월을 ‘첫 눈발이 땅에 닿는 달’, 그리고 1월은 ‘짐승들 살 빠지는 달’로 칭해 부른다. 지금 바깥은 혹독한 겨울 한 복판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온기가 절실할 즈음,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 한 편을 듣는다. 나보다 춥고 배고픈 자들을 걱정하는 할머니의 중얼거림에, 밤마다 어린 마음을 포개는 눈물의 기도 소리가 여운으로 맴돈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울 할매 생각이 난다. 어린 피붙이들을 끌어안고는 문풍지 틈으로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 주셨다. 몸부림칠 때마다 이불 귀퉁이를 다독이며 외풍에 시린 볼을 가만히 쓸어 주셨는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았는지 길고 짧은 한숨이 끊이질 않으셨다. 들릴락 말락 막내 고모 이름은 또 왜 그리 애타게 불렀는지, 그때는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슬펐다. 하지만 해가 뜨면 살얼음이 언 밥그릇을 내미는 단골 거지에게 밥을 퍼주며, 지난밤의 한숨을 날리시곤 했다. 1월, ‘얼음 얼어 반짝이는 달’이다. 이 땅의 모든 생명들에게 안녕을 기원해 본다. -천융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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