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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여기 어때] 남명 조식 유적지

산천재·남명매·덕천서원… 참 선비의 숨결 ‘오롯이’

  • 기사입력 : 2023-06-01 20: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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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왕봉을 사랑한 조선시대 대표 처사
    후학 양성 위해 덕천강변에 지은 산천재
    앞마당 매화나무 계절 따라 매력 발산


    지리산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는 산청군 시천면. 고개를 들면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리산 중산리 계곡과 대원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지나는 덕천강이 흐른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이 ‘무릉도원’이라 칭송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광이다. “그대는 요즘의 선비들을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남을 속입니다”라는 남명 조식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담기 위해, 평생을 맑고 깨끗한 품행으로 청렴을 실천한 참 스승,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를 찾았다. 남명 선생의 사상과 선비정신을 널리 알리고 제대로 배우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이곳에서 선생의 발자취를 뒤따라가 보자.

    남명이 나이 61세가 된 1561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 덕산(지금의 시천·삼장면 일원)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산천재(山天齋)와 선생이 직접 심은 매화나무 남명매(南冥梅)./산청군/
    남명이 나이 61세가 된 1561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 덕산(지금의 시천·삼장면 일원)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산천재(山天齋)와 선생이 직접 심은 매화나무 남명매(南冥梅)./산청군/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한 처사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선생(1501~1572)의 고향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다.

    선생은 61세이던 1561년 거처를 산청 덕산(지금의 시천·삼장면 일원)으로 옮겨 덕천강변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노년에 접어든 선생이 고향이 아닌 산청을 찾은 것은 지리산을 무척 흠모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자신이 쓴 지리산 견문록 ‘유두류록’에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을 다섯 방향으로 열한 번이나 갔었다”고 자술하고 있는데 그의 지리산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산천재는 산청지역 내에서도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손꼽힌다.

    선생의 천왕봉 사랑은 각별했는데 그 마음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 천왕봉을 닮고 싶다’는 그의 시(제덕산계정주)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생은 산천재를 지은 뒤 앞마당에 손수 매화나무를 심고 애정을 쏟아 돌봤다. 훗날 남명매(南冥梅)로 불린 이 매화나무는 올해 수령 462년으로 해마다 봄이면 천왕봉을 향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선생이 손수 심은 나이 많은 매화나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적지 않은 이들이 해마다 3월이면 이곳을 찾는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워내는 대견한 고매(古梅)다.

    지금은 계절에 따라 녹음 짙은 내음을 풍기며 산천재 앞마당을 지키고 있다.

    산천재를 둘러보고 있노라면 매화나무 앞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한 수의 시를 읊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탄생 500주년에 건립된 남명 기념관
    생애 유물·후학 기록 ‘학맥도’ 등 전시
    한국선비문화연수원은 연수지로 각광


    ◇백성 위한 실천 중시 사상, 후학 의병활동 이어져

    산천재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남명기념관을 볼 수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선생의 생애와 관련 유물, 후학을 기록한 학맥도 등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전시실을 만나게 된다.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남명기념관.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남명기념관.

    남명은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죄악”이라 가르쳤다. 그의 실천 중시 사상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전제돼 있다. 이런 선생의 가르침은 문하에서 공부한 후학들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앞다퉈 의병활동에 나서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와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장군을 비롯해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등을 비롯해 50여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나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 결국 경의를 바탕으로 백성을 위해 실천에 앞장서는 선생의 가르침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 것이다.

    남명선생 문집·책판을 보관하는 산청재 장판각.
    남명선생 문집·책판을 보관하는 산청재 장판각.

    ◇연수·세미나 최적지로 한국선비문화연수원

    산천재 바로 옆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선비정신과 실천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워진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은 연수·세미나 최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남명선비문화축제’ 기간에는 많은 관광객과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연구원을 찾아 ‘선비의 고장’ 산청의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연구원은 남명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구원을 찾는 연수생을 대상으로 청렴·인성·예절을 주제로 한 ‘선비문화체험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남명 선생의 민본주의와 실천사상을 시대정신으로 확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이처럼 연수·세미나 최적지로 각광받는 이유는 우수한 시설 인프라와 지역의 자연환경 덕분이다. 연구원에는 크고 작은 규모의 강의실과 숙박시설, 식당, 체육시설이 갖춰져 있어 학생들은 물론 공무원과 기업 등 단체 연수팀의 호응을 얻고 있다.

    남명 선생이 ‘무릉도원’ 같다고 극찬한 덕천강과 지척에 자리한 지리산 천왕봉과 대원사 계곡 등 자연환경이 우수해 ‘힐링 체험’에도 최적지라는 평가다.

    선생 타계 4년 후인 1576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선생 타계 4년 후인 1576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제자들이 세운 고즈넉한 덕천서원
    웅장한 자태 뽐내는 은행나무 눈길
    유생 휴식처 세심정도 옛 정취 가득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 세심정

    시천면 일대에서는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비롯해 남명 선생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산천재를 벗어나 중산리 방향으로 5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선생의 타계 후 4년 뒤인 1576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키 높은 은행나무. 둘레를 재려면 장정 서넛은 있어야 할 정도로 장골이다. 덕천서원은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몇 차례 소실됐다가 다시 제모습을 찾는 풍파를 겪었다. 하지만 서원 앞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몇백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모습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즈넉한 서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원 양 옆으로 심어진 배롱나무는 더운 여름이 되면 분홍빛 꽃을 피워 심심한 서원의 풍경에 활기를 더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수줍은 모습이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덕천서원을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이제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을 본받기 위해 덕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었다는 세심정(洗心亭)을 만날 수 있다.

    세심정은 선생의 사후, 제자이자 저명한 성리학자였던 최영경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휴식처로 세운 정자다. 비록 강은 치수사업 등으로 옛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지만 강을 바라보며 지어진 정자의 정취는 옛 그대로다.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세운 정자 세심정.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세운 정자 세심정.

    세심정 옆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거창 포연대에서 목욕한 후 지었다는 ‘욕천(浴川)’이라는 시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온몸에 쌓인 사십년간의 허물.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배를 갈라 죽음에 이를지언정 자신의 허물과 티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고결한 선비정신이 한 편의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지리산의 굳건하고 의연한 모습을 닮기를 바란 선비, 누구보다 앞장서 나라의 위기와 국민의 안녕을 지키라 가르친 스승, 흐르는 물에 자신의 한 점 티끌까지 씻어내 청렴함을 지키려 한 구도자.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 길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한 번 더 천왕봉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선생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본다.

    남명조식 초상화.
    남명조식 초상화.

    ☞ 남명 조식 선생은

    일찍부터 학덕(學德)을 갖춰 대성(大成)했다. 하지만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 동안 선비와 처사(處士)로 굳건히 일관했다. 38세 때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내려지고 왕이 만나기를 청했지만 매번 상소(上疏)로 의견을 전할뿐 나아가지 않았다. 오직 66세 되던 해 10월 초 상경해 왕을 잠시 뵙고 곧 귀향했다. 사후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했다.

    김윤식 기자 kimys@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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