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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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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비경 환상의 섬 (21) 통영 좌도

해풍 맞은 매실은 초록향 머금고
파릇파릇 청보리 초록물결 넘실

  • 기사입력 : 2010-05-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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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영시 한산면 창좌리 ‘좌도’. 한산도의 좌측에 있어 ‘좌도’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이준희기자/

    따가운 햇살에 탐스런 매실이 열렸다. 좌도는 매실 생산지로 유명하다.

    섬을 온통 하얗게 물들였던 매화꽃이 따가운 햇살에 탐스런 매실로 변했다.

    알알이 영글어 가는 매실을 보며 섬사람들의 마음도 풍성해져만 간다. 이제 얼마 후면 매실이 섬주민들의 쌈짓돈이 되어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줄 것이다.

    통영시 한산면 창좌리 ‘좌도’(佐島·110만5279㎡·126명 68가구). ‘매실’ 생산지로 유명한 섬 ‘좌도’는 한산도의 좌측에 위치해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남북으로 길게 가로누운 섬은 산등성이가 바다를 굽어보며 비탈을 이루고 마을을 감싸안은 듯한 느티나무 숲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거제도의 높고 낮은 산줄기들로 이어져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섬임을 느낄 수 있다.

    비산도, 추봉도와 함께 한산도를 보좌하고 있는 ‘좌도’는 섬의 동쪽에 위치한 ‘동좌’(이장 조명윤)마을과 서쪽에 자리 잡은 ‘서좌’마을(이장 박우석)로 이루어져 있다.

    한때(1965년 당시) 동좌마을에만 60가구 150~160명의 마을 주민들이 살 정도로 풍요로웠던 마을은 지금은 나이 든 노인들만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좌도 동좌마을에 청보리가 자라 섬마을의 운치를 더해 준다.

    1935년 일본인 카와우지 부부가 심은 매실나무.

    도시인들에 인기 높은 좌도 ‘매실’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좌도 ‘매실’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일본인 카와우지(川河) 부부가 좌도에 들어와 야산을 개간해 매화나무와 감나무 등 유실수를 심은 것이 좌도 매실의 시작이다. 당시 카와우지 부부가 살던 언덕 너머 집은 태풍 ‘매미’로 모두 사라져 터만 남았지만 당시 심었던 매실나무는 마을 곳곳에 살아 남아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다.

    이때부터 좌도 동·서좌마을 주민들은 집집마다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적게는 4~5주, 많게는 한 집에 70~80주의 매실나무를 심어 매년 봄이면 섬 전체가 하얗게 뒤덮인다. 섬사람들은 여기서 생산되는 매실로 ‘매실엑기스’를 만들어 도심으로 내보내고, 일부는 매실주 등을 담가 자식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동좌마을 조명윤(68) 이장은 “해풍을 맞고 자란 좌도 매실이 굵기도하지만 향이 끝내준다카이. 그래서 이 맛을 잊지 못한 도시 사람들이 수확철만 되면 주문을 한다아이가”라며 좌도 매실 자랑을 늘어놓는다.

    섬마을 어른들은 동좌리에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된 것은 약 100년 전으로 기억한다. 연근해에서의 설낚이, 수조망 등이 고기잡이의 시작이었다.

    조 이장은 “어릴 때 기억으로 한 배에 4명이 승선하는 풍선(風船·통구밍이·1t)을 타고 새벽 4시에 출발 안하나. 그라모 하루 종일 돌아감시로 노를 저어 새벽 2시나 되면 홍도에 도착 안하나. 이때부터 부리(방어), 참치, 돔(참돔)등을 낚았던기라. 홍도는 개기들이 많아 조금(15일)만 하면 배에 개기들이 그득한기라”라며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또한 섬에서는 농사도 제법 많이 지었던 것 같다. 땅이 부족해 맞은편 섬인 ‘송도’에까지 나룻배에 소를 싣고 다니며 고구마, 보리 등을 심을 정도였다고 하니 식량난이 극심했던 섬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젊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밭은 주인을 잃고 말았다. 섬사람들이 돌보지 않은 땅은 얼마 못가 황폐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는 섬 맞은편인 송도에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제법 살았지만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면서 모두 떠나 지금은 무인도로 변했다”고 말한다.

    매실나무가 둘러싼 동좌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큰 기와집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허물어져 폐가로 변했지만 한때 섬에서 큰소리쳤을 것 같은 부잣집으로 보인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나 사랑채, 잘 다듬어진 마루와 축담 등 제법 기품을 갖춘 집안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폐가로 변한 동좌마을 기와집. 한때 한산도 최고 부잣집으로 불렸다.

    예전 부의 상징이었던 ‘무쇠 목욕탕’.

    특히 뒤채의 ‘무쇠 목욕통’은 특정 부유층에만 한정될 정도로 부의 상징이었다. 이런 섬에 무쇠 목욕통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가마솥 밑에 직접 불을 때는 방식인 목욕통은 지름이 1m20cm 정도에 깊이가 90cm 정도의 무쇠 목욕통이 설치돼 있고 장작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실외에 있다. 이런 무쇠 목욕통을 일본말로 ‘고에몬부로’라고 하는데, 욕조 안에 들어갈 때는 위에 띄운 나무 뚜껑을 가라앉혀 깔고 앉아서 목욕을 한다.

    조 이장은 “이 집은 한때 한산도 최고의 집으로 불릴 정도로 부잣집이었다”며 “집주인이 권현망으로 돈을 벌었는데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흉물스럽게 방치됐다”고 말한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잠시 몸도 식힐 겸 마을 오른쪽의 느티나무숲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가린 우람한 느티나무가 시원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숲은 쭉쭉 뻗은 느티나무와 억세고 육중한 등걸을 한 포구나무가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듯 힘찬 팔뚝을 서로 엇걸고 수많은 잔가지들마다 푸른 잎들을 총총 매달아 두꺼운 그늘을 만들고 있다. 족히 200~300년은 된 듯한 느티나무숲은 언제 보아도 정겨운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좌도는 다른 섬에 비해 전기시설이 일찍 들어와 1975년부터 호롱불 대신 전깃불을 사용했다. 조 이장은 “한산도 제승당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과 섬마을 주민과의 면담에서 마을 대표가 좌도에 전깃불 사용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에 박 대통령이 흔쾌히 승낙하면서 거제도에서 좌도를 거쳐 한산도 제승당으로 이어지는 송전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 한산도 제승당의 혜택을 누린 셈이다.

    마을을 돌아 동좌리재로 가는 언덕에 세워진 학교로 향했다. 10여 년 전 폐교(1998년)된 한산국민학교 좌도분교는 섬주민들의 피와 땀이 맺혀 섬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학교다.

    한때 동·서좌 마을을 합해 1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텅빈 운동장엔 잡초들만 무성하다.

    조 이장은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 학교로 가던 나룻배가 침몰해 3~4명의 아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이 사고로 마을에서 좌도에 학교를 세워줄 것을 당국에 요구해 1963년에 이곳에 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섬사람들은 아무리 못 먹고 못 살아도 아이들 교육만은 제대로 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제. 그래서 장비도 없이 괭이와 호미로 흙과 돌을 머리에 이고 밤낮을 안 가리고 일을 했다카이.” 조 이장은 폐교된 교문을 쓰다듬으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1998년 폐교된 한산국민학교 좌도분교.

    언덕 위에 학교가 세워진 사연도 깊다. 섬주민들은 국민학교를 바닷가 근처에 세우기를 원했으나 당시 통영군수이던 강 아무개 군수가 고집을 해 언덕 위에 세웠단다. 조 이장은 “학교를 세울 당시 강 군수가 땅을 좀 볼 줄 아는기라. 강 군수가 여기에 학교를 세우면 좋은 일이 있을기라고 하더라꼬. 그래서 그런지 요기 학교 출신들이 서울대, 고대, 연대 등 명문대 출신들이 많은기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어쨌거나 학교는 폐교됐지만 명문대 출신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라는 말에 한번 더 학교를 둘러보게 된다.

    폐교된 학교를 나와 서좌마을 아이들이 책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다녔을 동좌리재를 넘어가려니 풀숲이 우거져 도저히 옛길을 찾을 수가 없다.

    좌도에서 제일 높은 고개인 ‘동좌리재’는 서 있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지명이 달라진다. 서좌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서좌리재’라고 부른다. 여하튼 옛 추억을 더듬으며 길을 나섰으나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동좌에서 서좌로 돌아가는 해안길을 택했다.

    100년을 이어온 좌도마을 우물. 지금은 식수원으로 수돗물을 사용한다.

    마을을 지나가려니 한 할머니가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고 있다.

    할머니는 “요즘은 수돗물을 받아 우물이 인기를 잃었지만 예전엔 마을에서 최고의 물이었다”며 “산에서 내려온 물이라 짭쪼름한 맛도 없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미지근해 손 시림이 없었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이 우물은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1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며 우물의 내력을 일러준다. 참 오랜만에 만나는 정겨운 풍경에 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니 속이 시원하다.

    동좌에서 서좌로 가는 해안로는 대략 3km 구간으로 300여m를 제외하고는 말끔히 포장된 시멘트길이다. 섬을 걷는 운치는 사라졌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의 감촉이 좋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이마의 흐른 땀을 식혀줄 때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들이 여기저기 풀밭에서 껑충껑충 날뛴다. 섬주민들은 고라니들이 너무 많아 걱정이란다. 푸성귀라도 조금 얻어 먹으려면 밭마다 일일이 그물을 쳐야 하니 섬주민들은 이 짐승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서좌마을은 동좌마을에 비해 크기는 조금 작지만 바지락과 해삼, 멍게 등 해산물이 풍부해 주민들의 인심도 넉넉한 편이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한 흔적이 역력한 서좌 마을은 집집마다 담벼락에 ‘한마음 한뜻으로 새마을 건설 이룩하자’, ‘헛(헌)마을을 없애자’는 문구 등이 남아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오르게 한다.

    좌도 섬마을 주민들은 오랜 숙원은 본섬(한산도)과의 연륙교 가설이다. 면사무소가 있는 본섬에서 볼일도 보고 배편이 잦은 한산도에서 육지와 섬을 오가며 장도 보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단다. 특히 많은 외지인들이 섬을 찾아 섬에 활기가 넘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섬사람들의 꿈인 연륙교 가설이 언제쯤 이루어질지 …, 하루 빨리 섬과 섬을 잇는 연륙교 가설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 가는 길

    좌도는 한산도와 지척에 있지만 배편은 하루 두 편밖에 운항하지 않는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오전 7시, 오후 2시 섬을 오가는 섬누리호를 이용하면 된다.

    ☞ 잠잘 곳

    좌도는 민박집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인심 좋은 마을 이장(조명윤 ☏ 011-9548-5583)에게 부탁하면 마을회관 등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다.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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