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남해안 비경 환상의 섬 (42) 남해 노도

김만중의 번뇌와 고독 서린 ‘문학의 섬’
늦가을 쓸쓸한 초옥엔 그리움만이…

  • 기사입력 : 2010-11-04 00:00:00
  •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언덕에서 바라본 ‘노도’. 서포 김만중의 마지막 유배지였다./이준희기자/

    아침 일찍 분주하게 길을 나선다. 남해 끝자락까지 짧지 않은 여행이라 그런 탓도 있지만,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 학자 서포 김만중을 만난다는 설렘이 더 컸다.

    남해대교를 지나 19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앵강만 초입에 있는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에 이른다. 벽련마을 포구에서 태평양 쪽을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떠 있는 섬이 바로 ‘노도’다.

    ‘노도’란 이름은 옛날 이 섬에서 노를 많이 생산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란다. 약 360년 전 선씨 성을 가진 이가 귀양살이로 처음 입주해 뗏목을 만들어 노를 저으며 육지와 왕래하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별칭으로는 마치 삿갓이 떠 있는 형상 같다고 해 붙여진 ‘삿갓섬’이 있다.

    벽련마을에서 노도까지는 약 1km 거리다. 정기선은 없고, 벽련마을과 노도 주민에게 전화로 연락하면 바닷길 여는 배를 띄울 수 있다. 연락처는 포구에 서 있는 푯말에 안내되어 있다.

    남해대교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큰 바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막상 배를 띄우려니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가 제법 높게 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바다날씨를 실감케 하는 순간이다. 거센 파도를 헤치고 배는 5분여 만에 노도에 닿는다.

    서포 김만중 유허 안내 표지판과 노도 마을 쉼터.

    마을 입구에는 노도가 ‘문학의 섬, 김만중의 유배지’라고 소개되고 있다. 안내 표지판 뒤로 마을쉼터가 있고, 좌측으로 김만중 유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높은 파도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높은 경사길로 200m 정도 위쪽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41만8964㎡의 면적에 3.5km의 해안선을 가진 노도에는 현재 14가구 1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바다를 어장 삼아 어업에 종사하는 집이 많았다. 요즘은 바닷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은 남해 바다에서 문어, 감성돔 등을 낚아 올리는 손맛이 좋을 때지만 지금은 섬사람들의 노령화로 어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도 주민의 배는 모두 3척, 이 배를 운항해 고기를 잡거나 낚시꾼을 안내할 주민은 5명에 불과하다. 할머니들은 밭을 일구어 고구마와 마늘을 재배한다.

    이 자그마한 섬에도 사람 사는 소리로 북적였을 때가 있었다. 섬 주민인 이석진(65)씨의 기억 속에는 약 30년 전 일로 남아 있다. 당시 노도에는 32가구 정도가 살았다. 그때만 해도 한 집에 형제가 5~10명씩이었던 때라 가구수는 적어도 마을 주민이 300명 남짓했다.

    상주초등학교 노도 분교에도 학생이 50명이 넘었지만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섬마을 분교는 폐교된 지 벌써 13년째다.

    마침 오늘은 마을 노인 중 한 분이 생일을 맞아 뭍으로 생일 잔치를 하러 나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씨는 “자식들이 모두 뭍에 나가다 보니 제사는 다 외지로 가져가고 생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는 잔치를 한다”며 노도의 생일 풍속도를 전한다.

    섬으로 들어오는 길의 파도가 높다고 말하니, 돌아오는 할머니의 대답이 섬사람답다.

    “내가 17살에 시집와서 60년간 이 섬에서만 살았소. 이 정도 파도는 무섭다고 말할 정도가 아닌데….”

    마을 할머니가 고구마를 캐고 있다.

    긴 세월 풍랑과 함께 나이든 마을은 조용하지만, 특유의 생동감이 있었다. 띄엄띄엄 만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느리지만 손을 쉬지 않고 고구마를 캐거나 마늘밭을 일구고 있다. 노랗게 익어가는 유자 열매와 감귤 나무도 구경거리 중 하나다.

    골목에서 만난 할머니 손덕점(81)씨는 반찬으로 쓸 고구마 줄기를 수레 가득 따왔다. 꾸벅 인사를 하니, “작은 섬에 뭘 볼거리가 있어 멀리까지 왔노”라며 반긴다.

    “노도에는 고구마가 많이 나는데 옛날에는 고구마 빼데기(삐데기)를 말리느라 골목이 좁을 정도였다. 200가마니씩 만들어서 재놓고 그랬다 아이가.”

    손씨의 아들인 최정배(61)씨는 노도 민박집을 운영 중이다.

    최씨는 “예전에는 할머니들이 민박집을 운영했지만, 연세가 들다 보니 힘이 들어 거의 그만두고 우리 집만 민박이라고 내걸고 있지요”라며 섬 사정을 말해준다.

    마을은 2009년 7월부터 12월까지 녹색숲 복원사업이 펼쳐져 덩굴이 깨끗하게 제거됐고, 동백꽃나무 1만2000주가 마을 곳곳에 심겼다.

    차후 문학관, 오솔길 조성 등 개발이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 노도 주민들은 ‘김만중’이라는 소중한 콘텐츠와 바다를 접목시켜 하루빨리 발전되기를 바라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김만중의 흔적 더듬기에 나선다.

    소설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 세 번씩이나 유배를 갔던 그의 마지막 유배지가 바로 이곳 노도.

    김만중은 1665년 정시문과에 장원해 1671년 암행어사를 지냈고,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동부승지를 거쳤으며 1674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다시 등용돼 1679년 예조참의에 이어 대사헌이 됐다가 탄핵돼 1686년 선천에 유배됐다. 1688년 풀려났으나 다음 해 다시 탄핵돼 남해로 오게 됐다.

    1689년부터 3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연보 등을 지었고 55세의 나이로 1692년 병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토록 파란만장했던 서포의 삶, 마지막이 새겨진 곳이 남해 노도다.

    김만중이 유배생활 동안 머물렀던 초옥 터를 찾아가는 길, 마을에서 멀어지며 바람소리마저 잦아드는 깊은 산길을 홀로 걷는다.

    붉고 노란 자연빛을 입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단풍잎들과 고추잠자리, 웬만한 시골에서도 본 적 없는 오묘한 색상의 나비들이 눈앞에서 춤추며 벗이 되어 주겠다고 하지만 호젓하게 걷는 기분은 옛날 유배객이 느꼈을 심정과 닮아가는 듯하다.

    방문객의 마음이 이토록 가라지는데, 임금에게 외면당하고 귀향 온 선비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보니 그가 노도로 귀향살이를 온 것이 오늘처럼 쓸쓸한 10월이 아니라 춘삼월이었던 것이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김만중이 잠시 묻혔던 허묘.

    마을을 등지고 한 십여 분 걸으니 세 갈래 길에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 위로 100m 가면 허묘 터, 좌측 아래로 200m 가면 초옥 터라고 안내한다.

    허묘 가는 길은 비교적 가파르다. 허묘까지 나 있는 돌계단은 무려 233개. 이 계단의 개수가 노도 방문의 증거가 될 수도 있으니 기억해 두는 건 어떨까. 계단을 오르는 시간은 무념무상이 된다.

    1692년 4월 숨을 거둔 김만중이 그해 9월까지 잠시 묻혔던 허묘는 비석이 없으면 무덤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편평하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힌 뒤 술 대신 물로 예를 갖추고 길을 재촉한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 생활을 했던 초옥 터.

    김만중이 직접 파서 사용했던 우물.

    다시 삼거리를 지나 초옥터에 닿았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앞뜰 삼아 가볍게 앉아 있는 초옥은 황량함이 가득하다. 연명하기 위해 직접 팠을 우물 터는 지나는 들짐승이나 목을 축일 수 있을 정도다. 유배객의 문밖 나들이를 막기 위해 가시 돋친 탱자나무가 심겨 있었을 집터 주변에는 동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섰다.

    마루에 앉아 보니 어느 관광지와도 견줄 만한 전망에 새삼 놀란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자연풍광과 멋진 비경, 산 속의 고요함, 어머니와 가족을 그리는 애절함, 나라로부터 외면당한 선비의 번뇌와 고독까지…. 이것들이 당시 김만중을 괴롭히고 또 달랬을 것을 생각하니 ‘구운몽’이 하룻밤 새 나왔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첩첩산중 발 묶인 선비가 하릴없이 오갔을 우물터와 집터 주변을 돌아본 후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초옥 터 쪽에서 나와 마을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수평선과 그 위에 솟은 산의 조화가 절묘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노도를 찾은 방문객이 걷는다면 짧지만 강렬한 산책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벽련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사천IC 또는 하동IC→남해대교→국도 19번 이용→남해읍→상주해수욕장 방향 이동면→앵강고개→상주면 첫 번째 마을(우회전)→벽련마을→노도

    또는 남해고속도로→사천IC→국도3호선→창선연륙교→삼동면→미조면→상주면 첫 번째 마을(우회전)→벽련마을→노도

    배편 연락처 이석진(010-8630-3175)·최정배(011-832-6432)·김정선(011-874-5744)·정봉기(011-568-4975)·김대식(011-598-5745)

    ☞잠잘 곳

    노도에 가면 최정배씨의 민박집을 찾으면 된다. 크지는 않지만 자그마한 방들과 마루, 세면장 등을 갖추고 있어 하룻밤을 묵기에 안성맞춤이다. (최정배 ☏011-598-5745,862-5745)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준희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