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박기섭
- 기사입력 : 2012-05-1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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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
거덜난 책등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
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
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
- 박기섭 <달의 門下>에서
☞ 고행을 견뎌낸 부모님 책장에서 가슴을 뚫는 고동소리가 애잔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서 무심한 나무처럼 ‘건성으로 읽은 아버지, 라는 책’, 튼실한 열매 얻는 기쁨에 평생 흙을 일군 아버지의 낡은 뼛속에서 바람소리 숭숭 들립니다. ‘거덜난 책등을 따라’ 누렇게 변질되고 만지면 바스러질 듯 휜 어머니 등은 태연히 하늘을 떠받치며 한없는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몇 장의 고뇌와 잡힐 듯 말 듯한 희망 몇이 섞인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을 꿰매고 계시는 부모님, 뒤늦게 그 사랑 보답하고자 하니 하늘나라에 가고 안 계십니다. - 김진희(시조시인)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