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간이역] 나비의 마음- 류경일
학교 화단 앞에서
노랑나비를 만났다
나는 나비와 부딪칠까봐
멈칫
나비도 나와 부딪칠까봐
멈칫
순간 나비가 나를
저만치 비켜 지나갔다
조그만 나비가
나보다 마음이 넓다
☞ 봄은 설레는 계절이다. 코로나가 시절을 압박해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아이들은 새 학년이 된다. 시끌벅적한 입학식은 못 해도 새 가방 메고 학교 갈 날을 손꼽아 기다...2021-03-04 08:07:05
[시가 있는 간이역] 홍도(紅島)- 김언희
시시각각 홍채의 색깔이 변하는 태양
퉤, 퉤, 퉤, 퉤, 퉤 침을 뱉어대는 파도
사방으로 튀는 침방울
좌판 위에서 선잠을 깨는 물고기
썩어갈수록 싱싱해지는 핏빛 물고기 눈알
몸을 던질 때마다 트램펄린처럼 튕겨 올리는 수면
살 떨리게 몰아세우는 時時 刻刻의 혀
너무 길거나 너무 짧은 혀, 요원한
G스폿, 요원한 독순술, 詩여
매 순간이 餓死 직...2021-02-25 08:03:48
[시가 있는 간이역] 예보- 임솔아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2021-02-18 08:04:24
[시가 있는 간이역] 콩나물시루-할머니 - 김종영
가슴에 담아두면 병이라도 나는 걸까
쓴소리 고운 소리 가둔 적 없던 시절
없는 집 싸리울처럼
든든했던 할머니
아랫목 빈자리는 아쉬움만 덩그렇고
흘려버린 시간들을 또다시 부어봐도
시루엔 지키지 못한
그 말씀만 흐른다
☞ 왕년에 우리들의 할머니들은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선잠 들다 깨어나서 콩나물시루에 물 한 바가지 ...2021-02-04 08:04:12
[시가 있는 간이역] 단지- 하인혜
언제는
나더러
우리 집 보물단지라고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부르던 엄마
이제는
설레설레 고갯짓에
우리 집 애물단지라며
한숨까지
몰아 내쉰다
☞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아이를 보물단지라 부르던 엄마가 왜 나중에는 애물단지라고 부르게 될까? 보물이 애물로 변하는 합리적인 이유나 선명한 기준은 없지만, ...2021-01-28 08:03:43
[시가 있는 간이역] 시인(詩人)- 안도현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러렁그러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 대고
몸을 비벼본다
☞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보일러가 돌아갑니다. 그러렁그러렁 보일러가 돌아갑니다. 겨울...2021-01-21 08:00:58
[시가 있는 간이역]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 신달자
눈 덮인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
내 집 노크를 했다
내가 문 열지도 않았는데 문은 저절로 열렸고
바람은 아주 여유 있게 익숙하게 거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내 집에 왔냐고 물었더니
여기 겨울 들판 아닌가요? 겨울 들판만 나는 바람이라고 한다
이왕 오셨으니
따뜻한 차 한 잔 바람 앞에 놓았더니
겨울 들판은 겨울 들판만 마신다...2021-01-14 08:00:38
[시가 있는 간이역] 부부- 제민숙
우리 집 기울기는 각도가 늘 다르다
어떤 날은 좁혀졌다 어떤 날은 벌어졌다
예각과
둔각 사이를
질정 없이 넘나든다
오래된 나사처럼 녹이 슬면 닦아주고
헐겁고 무뎌지면 조였다가 풀었다가
때로는 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그런 사이…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름은 ‘부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2021-01-07 07:59:47
[시가 있는 간이역] 연잎경(經)- 김형엽
바람이 왔다고
함께 흔들리지 않더라
먼저 흔들리겠다 다투지도 않더라
먼저 흔들린 잎이
온몸으로 제 바닥을 닿고 올 때까지
나중 흔들릴 잎이
깊은 그늘이 되어주고 있더라
비스듬히 기울어
의자도 되고 그릇도 되어주는 잎들이
오래 휘청거려온 사람들의 걸음을
한 번쯤은 안온한 수평으로 서게 하더라
☞ 비오는 날 연잎을 눈여겨보면 구슬 같은...2020-12-24 08:14:29
[시가 있는 간이역]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유홍준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가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대나무 우듬지가 요렇게 살짝 휘어져 있다
저렇게 조그만 것이 앉아도 휘어지는 것이 있다
저렇게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 있다
새는 보름달 속에 들어가 있다
머리가 둥글고, 부리가 쫑긋하고, 날개를 다 접은 세다 몸집이 작고 검은 새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창문 ...2020-12-17 08:02:02- [시가 있는 간이역] 청동검의 노래 - 임채성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 뼈가 시큰하다
얼어붙은 산과 계곡 자갈뿐인 들을 지나
신탁神託을 따라나선 길 흙먼지가 자욱하다
선지자 거울에 ...2020-12-10 08:09:29
[시가 있는 간이역] ‘금기 사항-시험 보기 전’ - 주미경
계란말이는 동생에게 양보해
외운 게 돌돌 말려 버리니까
양파링과 도넛도 먹지 마
뻥 기억력에 구멍이 나
축구화도 신지 마
뻥 정답을 차고 말 거야
선풍기는 틀지 마
아는 문제만 훅 날아가
알 것 같은 문제도 훅 날아가
망고 슬러시를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는 시험을
망쳐 제대로
망쳐
아니 아니 학교에 가지 마
교장 선생님께 인사하다가
핵심정리
총...2020-12-03 08:05:02
[시가 있는 간이역] 쓸데없는 짓을 하다 - 윤덕
홍매화 허리 자를 기계톱을 들고 꽃잎 지는 걸 아쉬워하고
나무 심을 구덩일 파다 꼬물거리는 굼벵일 보고는 왜 어둠을
파먹고 살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고로쇠나무를 심다 가지에 흐르는 수액은 몇 바퀴 돌다
내 몸으로 들어올 것인지
헤아려 보기도 하고
겨울에 피는 개나리꽃을 보고는 세상이 미쳤다고 지축을
흔들어 깨우기...2020-11-26 08:04:49
[시가 있는 간이역] 만두 쟁반 - 허연
이상하게 난 만두 앞에서 약하다. 일찍 떠나보낸 어머니도, 위태로웠지만 따뜻했던 어린 시절도, 제 살길 찾아 흩어지기 전 형제들의 모습도, 줄지어 쟁반 위에 놓여 있던 만두로 남아 있다.
어쩌면 인생은 만두다. 파릇한 청춘과 짜내도 계속 나오는 땀이나 눈물, 지친 살과 뼈, 거기에 기억까지 넣고 버무리는 만두는 인생을 닮았다.
하얀 만두피 속에 태생이 다른 것들을...2020-11-19 08:02:03
[시가 있는 간이역] ‘십만단풍설-율곡 이이’ - 오영민
가을이 오기도 전 예비 된 십만 단풍
화석정 앞에 두고 노을 먼저 짙었는데
어쩐지 늦여름 밤은 모를 것만 같았다
껍질마다 서리처럼 사과즙이 내리던 날
속수무책 불 싸지른 가을 앞에 무너지는
늦여름 신음 소리가 말굽인 양 다급했다
고삐 놓아 도망하는 그들의 행렬 뒤로
산과 들이 북을 때려 등 밝히는 눈빛들
일십만 정예 단풍의 빼든 칼이 삼엄하다
...2020-11-12 08: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