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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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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달팽이- 이분헌

  • 기사입력 : 2024-02-01 08: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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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뜬눈으로 밤을 지킨 가로등 불빛 건너

    찬바람에 더듬더듬 길 옮기는 달팽이

    가다간 잠시 멈추고

    폐지 몇 장 얹는다


    온몸이 저릿저릿 비린 통증 버텨가며

    달달한 커피믹스 위안처럼 달래고는

    낯익은 눈인사 건네며

    또 한 골목 스친다


    굴다리 샛길 지나 경사길 버둥거려

    한가득 채운 대가 손에 쥔 건 사천백 원

    수그린 뒷덜미에 앉은

    노을 자락 참 붉다


    ☞ 정부 차원의 ‘2023년 폐지 수집 노인 실태조사’에서 생계를 위해 폐지를 줍는 노인이 전국적으로 4만2000명에 이르며, 이들은 일주일에 6일씩 하루 5시간 넘게 폐지를 줍고도 한 달 수입이 약 16만원으로 나타났다. 평균연령 76세, 시간당 소득은 1226원이라고 한다. 달팽이는 밤이나 비 오는 낮에 숨어있는 곳에서 나와 활동하고, 다른 동식물계의 성장을 돕는 생태계의 순환자, 환경미화원 노릇을 한다. 자신의 몸집보다 더 높고 크게 쌓아 올린 폐지 손수레를, 꾸물거리며 더듬더듬 옮겨가는 달팽이로 바라본 시인의 눈은 따뜻하다.

    한파주의보나 폭염과도 상관없이 경사진 차도를 힘겹게 올라가는 폐지 손수레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자주 만나는 얼굴이기에 눈인사와 달달한 커피믹스로 용기 주고 “가다간 잠시 멈추고/폐지 몇 장 얹는다”라는 달팽이로 지켜본다. 온몸이 저리도록 일한 통증의 값으로 “한가득 채운 대가 손에 쥔 건 사천백 원”이라니 가슴이 아프다. 등짐 쥔 달팽이로, 수그린 뒷덜미에 앉은 노을 자락이 붉은 것은, 열악한 삶을 이어가는 왜소한 몸짓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저녁 빛이다. - 옥영숙(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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