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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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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고영조

  • 기사입력 : 2013-08-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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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 대신

    카레를 끓인다

    아내가 없는 동안

    양파와 감자

    당근과 마늘의

    뿔난 몸을 섞는다

    섞여서

    제 모습을 아주 버릴 때까지

    채찍으로 후려치거나

    섞이지 않는 몸들은

    더 작게

    토막 토막 자른다

    당근의 맛도 양파의 맛도

    죽인다

    쓰도 달도 않은

    저 묵묵부답

    다만 점액질의 순종

    얼굴 없는

    혼돈의 맛을 끓인다

    - 시집 <감자를 굽고 싶다> 중에서

    ☞ 카레는 고기와 채소들이 푹 고아져 서로 어우러져야 제맛입니다. 가끔 고기와 채소를 크게 썰어 그것들의 식감을 살리기도 하지만 그때의 카레는 소스 역할을 할 뿐입니다. 진정한 카레의 맛을 느끼려면 이런 재료들이 섞여서 진실로 한 몸이 되어야겠지요.

    아내가 없는 부엌에서 서툴게 요리하는 시인의 모습이 훤합니다. 요리할 기회가 별로 없는 시인에게 음식 만들기는 신선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다 ‘요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화두로 이어집니다. ‘뿔난 몸을’ 섞으며 ‘제 모습을 아주 버릴 때까지’ 각각의 성정을 죽입니다.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뿔들을 죽이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쓰도 달도 않은’ 경지에 이르고 싶어 합니다. 시인 앞에서 끓고 있는 카레는 ‘묵묵부답’의 선승처럼,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점액질의 순종’처럼, 구분되기 이전 ‘혼돈의 맛’을 보여주는 본래의 세계처럼, 공즉시색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서로에게 뿔이 되지 않고 자신의 것들을 버려야만 피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 카레의 향을 타고 실내 가득 퍼지는 것 같습니다. 이주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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