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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4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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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봄날엔 할 일이 많다- 장석주(시인)

  • 기사입력 : 2022-02-17 20: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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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묵은 매화나무 가지에 꽃눈이 맺혔다. 혹한을 견딘 매화나무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설레곤 한다. 매화 맑은 향기가 공중에 퍼질 땐 사는 일이 팍팍해도 우리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하지만 봄이 올 때마다 나는 딸꾹질 하듯이 찾아오는 우울증에 짜증을 내고, 대인 기피증으로 고립된 채 지내며, 해결해야 할 문제를 미루고 회피한다. 해질녘 핏빛에 잠긴 붉은 석양 아래 지친 새와 같이 깊은 피로에 사로잡힐 땐 스스로를 구제 불능의 실패자로 여기고, 자주 통제력과 의욕을 상실한다.

    우울증은 일조량이 준 겨울을 나면서 겪는 환절기 증후군이다. 뇌가 우울증에 잠식되면 사고의 균형을 잃고 모든 정보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인지 왜곡(cognitve distortion)’에 빠져드는 까닭이다. 비현실적 사고에 과몰입하며 비관에 기울어 종종 자해나 자살 같은 나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울증 따위에 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그러니 나는 우울증으로 낙담하거나 허송세월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금싸라기처럼 반짝이는 햇빛 아래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금생의 시간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

    어린 날의 봄은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반짇고리에서 찾은 골무를 끼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동안 나는 어린 동생과 뒷동산에 올라 새 둥지를 찾아 돌아다녔지. 저녁 때 어머니가 작년에 거둔 청둥호박으로 끓인 호박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한 이불 아래 잠 들었지. 호박죽 먹고 한 이불 아래 잠든 어린 형제는 재속 프란치스코 수도회 형제만큼 신실한 믿음을 갖진 못했지만 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옳은 지를 가늠하는 어른으로 자라났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랑잎처럼 이승을 떠났지만 세상은 그때보다 더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천지 간에 봄이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너무나 많은 이별을 겪고 맞는 이 봄날이 난생 처음 맞는 봄이 아니라고 슬퍼할 까닭은 없다. 씀바귀와 뿔남천에게 인사하자. 겨우내 추위에 시달린 길고양이에게도 인사하자. 청매화 몇 송이 피었다 진 뒤 양지 바른 데 선 산수유, 생강나무 가지에서 피어나는 노란 꽃을 환대하자. 봄은 벌써 저 남쪽에서 북상을 서두른다는 소식이다. 지금은 다랭이 논에 물이 차오르고, 물찬 논에서 우렁들이 새끼를 치는 봄날을 기다릴 때다.

    입춘 지나며 한랭전선은 북쪽으로 밀려났다. 어제도 오늘도 볕이 좋았다. 볕 좋은 날은 양팔을 휘저으며 발목이 시큰해질 때까지 걷다 돌아온다. 내가 사는 파주의 대기를 휘젓는 바람 끝은 아직 차갑다. 하지만 어깨에 다정하게 손 얹듯 내리는 도타와진 볕 아래 걷노라면 팔다리에 새삼 피가 잘 돌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건 신경화학전달물질인 도파민, 세레토닌, 엔도르핀 같은 호르몬이 돌기 때문일 테다. 오후엔 기름 두른 솥뚜껑에 배추전을 부쳐 막걸리 한 잔을 마신 뒤 ‘한 번도 길 놓치지 않고 오는 운명 같은 저녁’(이기철)을 호젓하게 기다릴 일이다. 밤엔 평생 가난했지만 안빈낙도를 꿈꾸던 김관식 시집을 꺼내 읽고, 오래 소식이 끊긴 지인들에게 안부 편지를 쓰자.

    언 강물이 풀리고 땅 속 구근들은 지표로 새싹을 밀어 올리는 중이다. 봄날엔 동내의를 벗어 빨아 널고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자. 사랑이 끝났다면 사랑 이후의 사랑을 꿈꾸자. 새들은 더 힘차게 공중을 활강할 때, 숯을 굽는 이들은 산에서 숯을 굽는 일에 열심이고,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는 바다에서 숭어를 잡는 이들은 그물에 걸려 퍼덕이는 숭어 몇 마리를 데리고 온다. 꽃들의 잔치에 불려 나온 꿀벌들이 잉잉대며 노래할 때 우리는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나 어린 인류를 보살펴야 한다.

    만물이 움트고, 뻗고, 피고, 생동하는 봄날엔 먹고 노래하고 사랑하라. 우리에겐 할 일이 많다. 봄이 귓가에 소곤거리는 말을 경청하자.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을 배우고 익히자. 길고양이가 먹는 밥에 독약이나 푸는 이들처럼 쩨쩨하게 살지는 말자. 짐승이든 사람이든 어린 생명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자. 키가 한 뼘쯤 커버린 어린 것을 무릎에 앉힌 채 가갸거겨 한글을 깨우쳐 주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도록 도와주자. 주말엔 이른 아침밥을 해먹고 지어미 지아비가 손 맞잡고 고창 선운사 뒤편 대웅보전에나 찾아가서 동백꽃이 피었나 아직 안 피었나 보고 돌아오자.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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