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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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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발달장애인 ‘집 밖으로 나서는 길’ (⑤·끝) 집 밖으로 나가는 길

사회적 인식·정치권 변화 통해 ‘당연한 삶의 권리’ 누려야

  • 기사입력 : 2023-10-18 20: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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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봄부터 자립까지, 우리나라 발달장애인 부모가 바라는 ‘24시 돌봄’을 실현하고 있는 독일과 스웨덴도 처음부터 정책이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부담이 가족에게 전가돼 자녀를 은폐하고, 시설로 보내버리는 암울한 역사가 그곳에도 있었다. 어떤 계기가 발달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었을까.


    독일, 부모들 앞장서 정책 변화

    나치 정권, 지적장애 아동·성인 학살
    부모들 장애아 숨기기 급급하다
    자조모임 ‘레벤스힐페’ 결성·정책 확산


    ◇암울한 역사를 자조하며 변화의 시작= 독일은 한국과 같이 장애인 부모를 필두로 정책의 변화가 시작됐다. 그 중심에는 독일 발달장애인의 부모 자조모임으로 1958년 만들어진 ‘레벤스힐페(Lebenshilfe)’가 있었다. 레벤스힐페는 처음에 ‘장애 아동’을 위한 단체로 만들어졌다. 당시 독일에 있었던 장애인은 모두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아동’밖에 없었다.

    과거 독일 발달장애인 아동들의 모습./Archiv Lebenshilfe/
    과거 독일 발달장애인 아동들의 모습./Archiv Lebenshilfe/

    나치 정권은 지적 장애가 있는 아동과 성인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장애아동은 특수 병동에서 약을 먹거나 굶어 죽게 내버려 두고 성인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서 가스를 쏘거나 다른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이 무자비한 학살은 1941년 8월, 뮌스터 주교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Clemens August von Galen)의 항의로 인해 살인행위가 공식적으로 중단됐다. 그때까지 최소 10만 명의 장애인이 죽었고, 이후로도 극비리에 장애인 말살이 지속됐다. 레벤스힐페는 이를 통한 총피해자 수를 25만 명가량으로 추산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은 장애인 아동을 숨기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레벤스힐페의 피어 브로케 연방 대표.
    레벤스힐페의 피어 브로케 연방 대표.

    레벤스힐페 피어 브로케(peer brocke·58) 연방 대표는 “장애인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인식 때문에 장애인을 낳은 부모들은 자식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고 숨기기 급급했다”며 “당시 장애아동을 모아 격리·수용하는 큰 시설이 있었고 아동들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시설에 있게 됐다”고 얘기했다. 그러다 네덜란드의 교육자 톰 무터스(Tom Mutters)가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발달장애 아동 부모들을 모아 ‘장애 아동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독일’을 위해 기관 설립을 역설했고 그에 동조한 부모와 함께 ‘레벤스힐페’가 생겨났다. 레벤스힐페를 주축으로 장애인 운동이 발발, 1960년대 장애인도 학교를 갈 수 있는 법이 제정된다.

    ‘장애 아동’을 위한 모임은 곧 모든 ‘장애인’들을 위한 모임이 됐다. 장애인 아동이 성인이 되면서 직장이 필요해지고, 집이 필요해졌다. 레벤스힐페의 관심은 일자리 정책, 주거 정책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됐다.


    스웨덴, 정치권 선도로 변화 물살

    장애인 ‘시설 보호’ 당연시하던 시민들
    지식인·정치인 나서 인권유린 실태 고발
    인식 바뀌며 시설 폐쇄하고 법률 정비도


    ◇‘탈시설’로 시작된 장애인의 자립= 과거 스웨덴의 장애인은 모두 시설에 있었고 시설 장애인에는 발달장애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은 시설에서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며 외출 한번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의 탈시설, 즉 독립생활(independent living)에 반향이 세계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스웨덴도 마찬가지였지만 시민들 사이에서 ‘탈시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장애인의 탈시설은 곧 가족의 부담이 증가한다는 인식이 있어서다.

    과거 스웨덴 시설에 수용된 발달장애인 아동들의 모습./Karl Grunewald ‘the care revolution’/
    과거 스웨덴 시설에 수용된 발달장애인 아동들의 모습./Karl Grunewald ‘the care revolution’/

    스웨덴의 탈시설 운동에 나섰던 사회운동가인 리타(Riitta-leeena karlsson·72)씨는 “당시 온전치 않은 이들은 시설로 보내고 비장애인만을 키우는 것이 보편적이었다”며 “오히려 장애인을 보호하기에는 시설이 더 적절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설명했다.

    스웨덴의 사회운동가 리타씨.
    스웨덴의 사회운동가 리타씨.

    민간의 인식을 바꾼 것은 지식인과 정치인들이었다. 국립의료시설의 감사관이자 아동정신과 의사인 칼 그루네발트(Karl Grunewald)가 장애인 시설과 전문 병원의 강제 불임시술과 비윤리적 연구 등의 인권유린과 열악한 환경을 폭로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1985년에는 시각장애인 정치인인 벵트 린크비스트(Bengt Lindqvist) 또한 시설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의 문제에 관한 전체적인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결국 스웨덴은 2000년 1월 1일까지 ‘무조건적으로’ 시설을 폐쇄하기로 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들은 대부분 발달장애인이었다.

    스웨덴은 시설 폐쇄에 대비한 법률 또한 정비했다. 집으로 돌아온 장애인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들을 보조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했다. 이것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삶을 동등하게 누릴 권리를 보장하는 핵심인 ‘LSS법’의 탄생 배경이다.

    ◇‘집으로 나가는 길’ 만들기 위해서는= 독일은 장애인 부모로 인해, 스웨덴은 지식인과 정치인들로 인해 장애인 정책의 변화를 맞이했다. 때문에 독일의 운동가는 ‘모이고 참여하는 것’을, 스웨덴의 운동가는 ‘정치권의 선도’를 사회가 격변하는 키포인트로 꼽았다.

    피어 브로케 연방 대표는 “변화의 시작은 함께 모이고 교류하는 것이다. 장애인과 그들의 가족은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고 모여가며 사회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또한 단체가 정책의 시작과 끝까지 함께 참여해야 한다. 법이 제정되고 나서 들여다보면 처음 취지와 다른 내용으로 갈 때가 많다”고 조언했다.

    리타씨는 “현재 상황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 적나라한 상황을 민간에게 알려 인식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한다”며 “거기에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면서 법을 제정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이 시설폐쇄 과정에서 진척이 느려지자 1997년에 아예 시설을 폐쇄하라는 ‘시설폐쇄법’을 제정한 것을 예로 들며 “국가적인 결정이 있었고 이 강제령으로 각 지자체는 빠른 속도로 자립이 가능한 그룹홈 등의 제반 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인식을 바꾸는 일이 가장 힘들다는 것에 입을 모았다. 역설적이게도 장애인이 사회에서 보여야 진정 장애인을 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발달장애인들이 사회에 하나둘 보이고 관계를 맺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됐다.”


    한국, 장애인권리협약 비준 ‘첫발’

    선택의정서 가입으로 권리구제 ‘희망’
    약자 아닌 ‘국민’ 인식하고 정치권 변해야
    발달장애인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어


    ◇‘약자’가 아닌 ‘국민’으로= 우리나라는 지난해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의 선택의정서에 가입했다. 선택의정서는 장애인이 장애인권리협약에 따른 권리를 침해당했으나 이를 국내 법이나 제도로는 구제받을 수 없을 때,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를 통해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장애인권리협약’ 이행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때문에 장애인 부모들은 희망을 얘기한다.

    윤종술 경남장애인부모회 회장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지난 2011년 선택의정서를 가입하면서 더 빠른 정책 변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는 지난해 유엔에 의해 장애인권리와 관련한 83가지 권고를 받았다. 민간과 논의하며 권고를 준수해 나간다면 정책이 빠른 속도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발달장애인이 더는 집 안에 머무르지 않고 집 바깥으로 나설 수 있는 미래를 바라본다. 장애인권리협약의 선택의정서 비준으로 ‘첫걸음’은 이미 디뎠다. ‘두 번째 걸음’은 정책을 변화시키는 주체인 정치권의 변화다.

    “정치권이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바뀌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삶의 권리’를 생각하게 되고 정치적 이권과 다툼 없이 그것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그때야 비로소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 거예요.”

    글·사진=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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