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발- 이기인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얘야, 돈벌레는 잡지 마라 돈벌레는 돈을 갖다주는 벌레란다물을 먹은 벽지가 힘없이 떨어지던 날옛날 집주인의 벽지에서 연꽃이 한 송이 주욱 벌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움찔움찔, 기어나온 돈벌레꽃잎 속에 숨어 있는 돈벌레, 요놈을 어찌할까요, 어머니발바닥도 많은 놈이, 어이어이 도망쳐야 ...2012-01-26 01:00:00
-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1. 마징가 Z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2012-01-19 01:00:00
- 밥의 도덕성- 김 륭밥이 온다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밥그릇 가지고 공갈치지 말라고 퉁퉁 불어터지는 짜장면과 짬뽕의 자유분방한 슬픔에 대해 짜장면을 시키면 짬뽕이 먹고 싶고 짬뽕을 시키면 짜장면이 먹고 싶은 거짓 없는 사랑에 대해 질질 침 흘리지 말라며쥐뿔도 개뿔도 없이 방귀뀌지 말라고 가끔씩 프라이팬을 들고 설친다고급...2012-01-12 01:00:00
- 새들의 페루- 신용목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도심 복판,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꽉 물고 놓지 않는바람의 위턱과 아래턱,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2012-01-05 01:00:00
-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웠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2011-12-29 01:00:00
- 계단이 존재하는 곳- 이수명계단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계단을 생략하고 계단을 끌어내리고 아이들이 놀고 있다.계단이 존재할 곳은 어디인가계단끼리 부딪쳐 구부러지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굽은 표면 위에서 구부러지는 아이들.아이들의 불가능한 배열로 계단은 공평해지고누구의 입김이 와서 그을음이 이토록 연약하게 걸려있기에 아이들이...2011-12-22 01:00:00
- 토요일 밤에 서울에 도착한다는 것- 김혜순자정이 넘은 시간운전사와 필름 끊긴 취객 둘이 타고신나게 종로 거리를 달려가는환하게 불켠 심야 버스처럼밤새도록 눈 한 번도 안 깜빡이는응급실 하얀 네온 간판처럼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링커를 꽂고누워 있는 자정의 종합병원처럼탁자마다 속이 다 비치는옷을 입은 전화기가 저마다 소리치고 우는카페 펄프처럼삐...2011-12-15 01:00:00
- 고니 발을 보다- 고형렬고니들의 가느다란 발이 논둑을 넘어 간다넘어 가면서 마른풀 하나 건들지 않는다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나는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발을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고니들의 길고 가...2011-12-08 01:00:00
- 겨울 군하리- 김사인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잿빛 도로가 나 있다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 있다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흙에 반쯤 덮여 있다담벼락 끝에서 쓰다 버린 쪽문을 밀고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2011-12-01 01:00:00
- 나의 하느님들 아픈 곳을 수술받기 위해 병원에 오고 보니내 몸을 살피는 의사가 하느님 같다일생 나의 하느님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어릴 때는 부모님이었다가결혼해서는 남편이었다가이제 몸 아프니 의사가 하느님처럼 보인다그런데 자식은 나보다 커도 하느님이 될 수 없다아직...2011-11-24 01:00:00
- 진경산수(眞景山水)- 성선경자식이라는 게젖을 떼면 다 되는 줄 알았다새끼라는 게 제 발로 걸어집을 나가면 다 되는 줄 알았다시도 때도 없이-아버지 돈그래서 돈만 부쳐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그런데 글쎄어느 날 훌쩍 아내가 집을 나서며-저기 미역국 끓여 놓았어요-나 아들에게 갔다 오겠어요나는 괜히 눈물이 났다이제는 내 아내까지 넘보다니...2011-11-17 01:00:00
- 시곗바늘- 박서영삽 세 자루가 누군가의 얼굴을 파내고 있다사라지는 시간의 작은 외침이 재깍재깍 들린다눈썹을 밀고, 눈알을 파내고, 코와 입을 지웠다한 바퀴 돌고 돌아와 지운 얼굴을 또다시 지운다 삽은 또 구덩이를 판 후 물컹한 것들을 파묻기 시작한다 사라지는 시간의 작은 외침이 퍽퍽퍽퍽 들린다머리카락 한 올 없는 저 둥근 ...2011-11-10 01:00:00
- 권투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태형왜 내가 여기서 흠씬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는지어떤 미친개가 내 안에서 또더러운 이빨로 생살을 찢고 기어 나와 몸을 일으키는지나는 두 눈으로 똑바로 봐야 한다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얻어맞아 곤죽이 되는 것보다그래도 보이는 주먹이 더 견딜 만하다누가 나를 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개는 어둠을 향해 짖을 수...2011-11-03 01:00:00
- 콩나물- 박성우너만 성질 있냐?나도 대가리부터 밀어 올린다-시집 ‘거미’(2002. 창비) 중에서☞ 중장년층에게 이 시를 읽히면 피식, 웃음부터 터뜨립니다. 왜냐구요? 콩나물이 나고 자라는 특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윗목에 콩나물시루가 놓여 있어서 그 콩나물 나고 자라는 걸 자동적으로 보았기 ...2011-10-27 01:00:00
-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딸애는 침대에서 자고나는 바닥에서 잔다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나는 바닥이 편하다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2011-10-20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