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2015-03-05 07:00:00
- 세상의 잡것들을 위하여- 정순옥
기냥 둬라 잉 우리덜이라고 별거 있다냐, 갸들도 다 살아보것
다고 나온 것 아니것냐, 엄마 이건 잡초잖아요 너저분 보기 싫
은데, 야아는 시방 고것들 땜시 이쁜 꽃도 눈에 띄제 즈그덜이
다 꽃만 허것다고 해봐라 그게 워디 꽃으로 보인다냐?
두어 평 남짓 홀로 화단에서
잡초를 뽑아내려는 ...2015-02-26 07:00:00
- 즐거운 소음-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 아래...2015-02-12 07:00:00
- 꽃의 자리- 우무석
꽃은 피어야 할 제자리를 안다
어느 곳이어야 산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가를.
흙 속에 바람 속에 하늘 속에
꽃다이 피어야 할 자리를 찾아라,
더 늦기 전에.
☞ ‘죄’라는 말의 히브리원어는 ‘핫타스’인데 그 어원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엉뚱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이슬기 기자 2015-02-05 07:00:00
- 벗에게 부탁함-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수돗물의...2015-01-29 00:00:00
- 열쇠는 안에 있다- 김소원
우유와 신문, 넘치는 광고지까지
속없는 듯이 잘도 받아들이던 문
이제 완강하다
초인종과 휴대전화 길게길게
안에서 운다
열쇠 집 사내마저 고개 저은
내가 열 수 없는 나의 집
문 하나 너머 서랍 속에
여러 개의 열쇠가 들어 있다
문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는다
발목을 적시다
얼굴까지 찰랑대...2015-01-22 00:00:00
- 푸른곰팡이-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2015-01-15 00:00:00
- 낙타- 유자효 어미 잃은 새끼 낙타에게 젖을 허락하지 않던 암낙타가마두금을 불어주고 주인이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주자눈물을 흘리며 이윽고 젖을 물린다낙타가 마음을 여는 데도 마두금 연주 정도는 필요하건만나는 네 마음을 열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했단 말인가☞ 새끼를 낳은 어미 소들 중 어떤 소들은 송아지에게 젖을 물...2015-01-08 00:00:00
- 오래 익은 사랑- 이태희 늦은 밤 찬밥을 나누고귤 한 봉지 둘레로모여 앉은 식구들미끄러운 세월의 껍질한 겹씩 벗겨내면열 조각으로 나뉘는이 시린 겨울밤은 깊어가고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둥글게 모여 앉은 식구들이어둠의 각질을 뚫고 퍼져나가저마다 푸른 잎사귀 펄럭일 때까지제 몫의 오래 익은 사랑 나눌 때까지☞ 이 세상에서 가족 사...2014-12-18 11:00:00
- 세상의 모든 어미- 이지엽
남자들은 가래로 뻘 파 쉽사리 잡지만
여자들은 힘이 달려,
몸뚱아리가 연장이여
팔 걷고 쑤셔 넣다 보면 어깨까지 다 닿는겨
줄에다 산 낙지를 묶어서 손에 달고
살째기 집어넣으면
속에치 꼬셔 나오제
으찌나 잽싼지 몰라 깜빡 하믄 나만 망해불어
알 까고 죽은 낙지는 살 썩어도 냄새...2014-12-11 11:00:00
- 묵죽(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2014-12-04 11:00:00
- 사랑의 길- 윤후명 먼 길을 가야만 한다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살 길은 늘 아득하다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그게 사랑이다언젠가 사라질 때까지그게 사랑이다☞산다는 일이 참 아득하게 느껴지는 분들 많으실 테지요? 하루하루 사는 일이 힘에 겹고 아무리 희망을 떠올려 보려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2014-11-27 11:00:00
- 고갯길- 고영조
우리 할배 웅남장에 소 팔러 가실 때 송아지 팔지 말라고 울며 떼쓰는 나에게 “울지 말고 있거라 송아지 팔아서 자전거 사줄게” 하셨다 그러나 할배는 여우가 나온다던 밤이 돼도 안 오시더니 한밤중에 나를 깨워 고갯길 가리키며 “저기 고개에서 할배가 탁! 넘어져 자전거가 그만 산 아래로 굴...2014-11-20 11:00:00
- 겨울 지리산- 이경 사람도 짐승도 먹을 것 없는 밤이 길었다풀 먹은 닥종이 한 겹을 사이에 두고새끼 가진 승냥이가 문밖에 와서 울었다포식자들이 득실거리는 야생의 밤우리에겐 호롱불 하나와 어머니가 있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창호지 한 장을 격한 채 목숨과 목숨이 팽팽하게 줄을 당깁니다. 승냥이의 배고픔의 힘과 어머니의 ...2014-11-13 11:00:00
-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사막도 애...2014-11-06 1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