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근로- 김주경 시청 앞 잔디광장에 희망꽃이 피었다속도전에 숨이 가쁜 로터리 한가운데온 몸을 풀 더미에 묻은 정중동의 꽃무리바닥에서 바닥으로 주소를 옮겨가며도시의 환부마다 까무룩 엎드리던저들의 거친 손끝에서 도시는 완성된다토끼풀 애기똥풀 언제 뽑힐지 모르는시한부 이름들이 스크럼 짜고 앉아희망을 돋을새김 한다 꽃,...2014-04-03 11:00:00
- 그림자의 농도- 천융희호수를 긋고 가는 아침 여덟시벤치에 걸쳐진 한 사내가그늘 속 제 그림자 위로 긴 숨을 토해낸다어깨에 매달려 떠도는 가방 속,민망하게 구겨진 하루치 노동과가파른 계단 끝에 걸린 퀭한 살림들수면에 흩어져 가물거리고돌에 눌러 절인깻잎 몇 장 진설한 채새까맣게 탄 목구멍을 흘러내리던 낮술이일회용 컵에 거꾸로 ...2014-03-27 11:00:00
- 취업일기- 옥영숙스펙으로 무장하고정규직을 구하던아들은 스물네 번의 고배에 고개 꺾여청춘은 감춰둔 죄 하나 들킨 듯 모로 누웠다살과 뼈에 속속들이 땀과 눈물을 섞어시장에 내다 팔자기소개서에 옷을 입혀떨이요,떨이를 외치는목젖이 부어올랐다그저 한번 훑어본 후흑백이 구별되고삭제되는 이력 앞에눈을 비비고 비비며전송된합격...2014-03-20 11:00:00
- 진진(辰辰)- 김유경내 이름은 진진. 흰 별이 두개. 가문비나무 위에 총총 떴지. 여름에 잘 보이고 겨울엔 더 잘 보였어. 잎이 다 떨어진 싸리 빗자루 같은 나뭇가지. 까만 밤하늘에서 둥치 쪽으로 별을 쓸어 담았지. 쓱쓱 싹싹. 할아버지 귀에는 하늘의 소리까지 들렸어. 진, 진진. 한 글자의 반복. 그건 다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갈...2014-03-13 11:00:00
- 병산우체국- 서일옥이름 곱고 담도 낮은 병산 우체국은해변 길 걸어서 탱자 울을 지나서꼭 전할 비밀 생기면몰래 문 열고 싶은 곳어제는 봄비 내리고 바람 살푼 불더니햇살 받은 우체통이 칸나처럼 피어 있다누구의 애틋한 사연이저 속에서 익고 있을까 ☞ 시인은 오래전 담 낮은 병산우체국 앞 지나온 적 있었네. 무엇이 그녀의 바쁜 발을...2014-03-06 11:00:00
- 온더록스- 김 루온더록스 *네 슬픔이 긍정이란 말은 삼가 줄래 검은 타이 깊게 조여 전율하는 감정까지 지배하려는 건 죄악이야밤이 시리다는 표정으로 너를 찾지는 않아 비둘기의 입술이 우스꽝스러워 장엄하게 비상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너의 연미복을 강요할 때 난 미친 듯이 마시지오랜 시간 침묵을 들이키다 보면 틈이 없는 검은...2014-02-27 11:00:00
- 바람의 변명- 김석선강물을 흔들던 바람은떠나는 이유가 강물 탓이란다흔들어도 흔들어도 얼굴만 찡그릴 뿐마음 열지 않는 저 강물 탓이란다계절 몇 개를 끌고 다니다막다른 골목마다 내팽개쳐 놓고도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단다기억도 사라지고 추억도 사라지고이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바람은이게 모두 강물...2014-02-20 11:00:00
- 벽속의 귀- 이경숙벽속의 귀- 이경숙마음이 울퉁불퉁한 날은 자꾸 귀가 벽 쪽으로 자란다.소리를 담으려는 귀가 벽을 뚫으려는 것인지,귓바퀴를 둥글게 세워 벽의 아랫부분을 뚫으려 애를 쓴다.한 쪽 귀가 몸통보다 커질 무렵 소리가 벽으로 선다.벽을 뚫으려 애쓰는 소리와,소리를 담으려는 벽과,벽을 뚫으려 자라는 귀의 삼각관계.방의 ...2014-02-13 11:00:00
- 출근- 김하경 나는 밥벌이를 간다 차창에 금방 씻고 나온 해가 뜬다 저 산봉우리와 봉우리가 새색시 젖무덤이다 능선에 걸친 해는 젖꼭지라 하자 둥글둥글한 젖가슴이 잘 차린 내 아침 밥상이다 배밀이 하듯 하루를 기어가는 어린 짐승 얼굴에 묻은 우유 빛 자국이 질펀히 묻었다 밤새 젖주림에 칭얼거렸던 어둠 젖어미 따스한 온기...2014-02-06 11:00:00
- 그림자 나무- 이기영나는 해를 받아먹는 나무지요가지마다 푸른 입 유전자처럼 달려서푸른 혀 내밀고 뜨거운 해를 먹지요해 먹는 나무는 아이를 가지지 못해요태어나지 못하는 아이는뜨거운 처녀막 찢고 새가 되어 날아가지요당신은 달을 받아먹는 그림자지요우듬지마다 달집 지어놓고입술을 새조개처럼 열고눈이 하나씩뿐인 새를 기다리지...2014-01-23 11:00:00
- 즐거운 그녀들- 정이경퇴근 무렵 예기치 않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다짜고짜 국수를 사 주겠다고 하였다단순해진다는 것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갔다거나다가왔다는 뜻이리라중원로터리 쪽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다시 울리는 벨소리경화시장의 촌국수집으로 장소가 바뀌었다고이미 한통속이 되어 그 어디라도 갈 수 있겠다 싶어졌다약속이나 한 ...2014-01-16 11:00:00
- 진이의 노래- 조예린화담 선생님!배꽃 필 즈음천마산 박연폭포 한 번 놀러 가요.피어 터치는 보라 물안개머리에는 수천 개 흰 꽃을 달고너럭바위 위에거문고 산조를 불러 드릴게요.구곡 달빛 썰어 묵힌 이화주맑은 잔을 씻을 때선생님께 술대를 넘겨 드리지요.한 송이 술에 아슴히 취해꽃 같은 버선발 춤을 추며는선생님 시조 한 수화답 주...2014-01-09 11:00:00
- 뿌리의 방- 박서영열대의 비닐하우스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자랄 수 있을까.얼마만큼의 고백과 표현을 할 수 있을까.나무의 혀들이 모래흙 밖으로 나와 있다.잎사귀가 축축 늘어져 있어 혀의 진실은 감춰져 있다.파파야와 바나나, 이런 이름표가 없었다면처음 만나는 우리가 악수를 할 수 있었겠는가.아직 자라지도 않았는데 익어버린 열...2014-01-02 11:00:00
- 유리창 한 장의 햇살- 최석균안 보이던 것이 갑자기 선명할 때가 있다. 유리창 한 장으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앉았다. 그 몸에 발을 담가본다. 그 마음에 손을 적셔본다. 따뜻하다. 오래 보고 있으니 조금씩 기운다. 천천히 옮겨간다. 지금껏 네 주변으로 다가간 몸의 열기 마음의 빛, 그렇게 살아있다. 네모거나 둥글거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2013-12-26 11:00:00
- 약속- 김하경나뭇가지 끝에서 매미가 울 때는땅꾼의 집 물통에 뱀을 가두곤 했다땅꾼이 가둬둔 살무사 뒤엉키는 소리에동구 밖 탱자나무 울타리까지 들썩거렸고살점이 찢어져라 뒤틀고 날뛰는 진동이 멈출 때똬리를 푼 시간들도 힘없이 늘어졌다포크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풀 속을 달리던 뱀나는 물통을 쏟아 삶의 길을 만들어주고 ...2013-12-19 1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