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 홍진기오월은 별과 함께 눈 뜨고 잠을 잔다때로는 포연처럼 아프리카 들소처럼모정에 발싸심 나서벌떼처럼 일어선다그러나 우리는오월을 잘 모른다산야를 밀고 나오는풀꽃들의 생존까지잔인한이름 하나로춘투라 적고 있다- 홍진기 시집 <거울>에서☞ 담장 너머 꽃들이 햇살 아래 곤한 잠을 청하는 오월의 달력에는 빨간 ...2012-05-17 01:00:00
- 책- 박기섭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그 밖의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 거덜난 책등...2012-05-10 01:00:00
- 효자가 될라 카머 -김선굉 시인의 말- 이종문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머너거무이 보자마자 다짜고짜 안아뿌라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다큰 기 와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된다.- ‘효자가 될라 카머-김선굉 시인의 말’전문 <가람시학, 창간호>☞ 늘 주기만 하고 더 ...2012-05-03 01:00:00
- 모란- 이우걸피면 지리라지면 잊으리라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져서도 잊혀지지 않는내 영혼의자줏빛 상처.- 시집 ‘네 사람의 노래’ 에서 ☞ 영혼의 깊은 우물에서 한 두레박씩 퍼 올린 갈증이 여백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여백에서 시의 화자는 되뇝니다. 한낱 기억에서 망각으로만 점철되는 인생은 무효라고요. ...2012-04-26 01:00:00
- 폭포 앞에서- 김교한분노가차거들랑여기서 다 풀어라아무리 혼미해도우람한 그대 도량안개 속진세를 정화하는줄기찬 여명의 함성-시집 ‘잠들지 않는 강’에서☞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해 눈썹이 떨리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어두운 골목을 걸어 나오면 가슴속 분노는 흰 줄기 절벽의 끝에 서 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저 함성은 누구의 넋...2012-04-19 01:00:00
- 놓친 길- 이승은더불어 걸어왔던 순한 길이 사라졌다문 밖 늘 궁금해도 섬뜩해진 나의 외출행방을 놓친 길들이 실핏줄에 얽혀있다길에 치인 자국마다 꽃잎은 시들어가고그때부터 몸 어딘가 간이역이 들어섰다가끔씩 어깨 언저리 시린 까닭 알겠다-시집 ‘꽃밥’에서☞ 우리는 매일 각자의 길을 향해 달립니다. 길 위에서 가끔 새치기도 하...2012-04-12 01:00:00
- 열일곱 살쯤(김승희의 ‘새벽밥’에 기대어)- 강현덕별이 밥이던 시절밥이 별이던 시절낮은 지붕 위로 퐁퐁 솟아나던밤하늘 가득 담기던主食이던 그 시절새벽녘 내 눈물 노린 몇 줄의 문장들이위로 위로 솟구쳐 거기 또 담기던그러면 허겁지겁 퍼먹고 대문을 나서던-시집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 별을 밥 먹듯이 밥을 별 보듯이 지낸 시절, 배고픈 밤하늘에 ...2012-04-05 01:00:00
- 아지랑이- 조오현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우습다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우습다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시집 <아득한 성자>에서 ☞ 봄날, 아지랑이는 긴 겨울을 ...2012-03-29 01:00:00
- ‘ㄹ’자- 이은상평생을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인제사 여기와서ㄹ(리을)자를 배웁니다ㄹ(리을)자 받침 든 세글자자꾸 읽어 봅니다제‘말’을 지키려다제‘글’을 지키려다제‘얼’을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끌려와ㄹ(리을)자같이 꼬부리고 앉았소.- 이은상 ‘‘ㄹ’자’ 전문. <노산시조선집>☞ 숨 막히는 밀서를 읽듯 행간을 짚어봅니...2012-03-22 01:00:00
- 근황- 김상옥근황여윈 숲마른 가지 끝에죽지 접는 작은 새처럼,물에 뜬젖빛 구름물살에 밀린 가랑잎처럼,겨울 해종종걸음도창살에 지는 그림자처럼.-김상옥 ‘근황’ 전문, 시집 <촉촉한 눈길> ☞ 그대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어깨 죽지 접은 새처럼 마른 가지 끝에 서 계시지 않은가요? 늘 위태롭기만 한 우리네 삶, 무겁게 내려...2012-03-15 01:00:00
-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문상을 하고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저건 네 구두고저건 네 슬리퍼야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봉투 받아라 봉투,화투짝...2012-03-08 01:00:00
- 소원- 고은제주도 삼년생 똥도야지가 똥 먹고 나서 보는 멍한 하늘을 보고 싶으오두어달 난앞집 얼룩강아지 새끼의 빠끔한 눈으로어쩌다 날 저문 초생달을 보고 싶으오지지난 가슬 끝자락 추운 밤 하나다 샌 먼동 때뒤늦어 가는 기러기의 누구로저기네저기네내려다보는 저 아래 희뿜한 잠 못 잔 강물을 보고 싶으오그도 저도 아니...2012-02-23 01:00:00
- 반성 673- 김영승우리 식구들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서럽다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밍키를 보면서럽다.밖에서 보면버스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병원에서, 경찰서에서……연기 피어오르는동네 쓰레기통 옆에서. ☞ 나도 누군가에게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서럽다’고 했더니 그 말뜻을 잘 못 알아듣더군요. 다들 잘 먹고 잘 사나...2012-02-16 01:00:00
- 11층- 최석균밀리다보니 벼랑베란다라고 불러야 하나대청마루쯤으로 여기고바깥 구경을 하며 바람을 쐰다물을 정수기에 걸러 마시듯이바람도 온전한 바람이 아니고방충망과 정화기로 거름 바람이다어쩌다가 물과 바람마저걸러서 들이켜는 길까지 왔을까겁도 없이 저녁마다 올라와아침마다 뛰어내리는아찔한 벼랑☞ 이 도시의 곳곳에 ...2012-02-09 01:00:00
- 대보름- 송창우일곱물뭍 간 누이는동지섣달에도 오지 않았다어머니는 부뚜막에 앉아흉이라 업이라생손을 앓는 저녁쇠똥 숯불 휘날리며막배 떠난 선창가 헤매 다녔다고향 가는 길이다동구 밖 돌아가는 갈대숲오늘은 내가어머니 간을 빼러 간다갈잎들흔들리고 있구나떨고 있구나☞ 돌아오는 월요일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제 직장이 있는 ...2012-02-02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