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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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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판결의 변화, 세상의 변화- 정성헌(경남대 법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23-01-24 18: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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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미와 같은 판례법국가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판결은 법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판결이 이후 다른 사건에 대한 판단을 구속하지도 않고,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이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과 같은 하급심에 ‘법적으로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법관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이미 이루어진 동종사건에 대한 다른 판결이나 대법원의 판결과 배치되는 판결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적용되는 법은 하나인데 판결이 달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법을 믿고 따라야 하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일일 수 있다. 사실 법은 그 자체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답을 주기에는 너무 추상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법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할지 모르지만, 법은 어떤 특정 사례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일어난 다양한 사건을 포섭해야 하며,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응해내야 한다. 그래서 법이 추상적인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필요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법을 사건에 적용해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는 추상적인 법규범을 보다 구체화하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해석의 내용에 따라 판결의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법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는 통상 기존의 판결들이 가지는 ‘사실상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다른 판결이나 상급법원의 판결과 다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서라도 어쩌면 많은 용기가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특히 대법원 판결의 경우는 그와 다른 해석을 한다고 한들 대법원에 가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면, 굳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의미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다행일 수도 있다. 아직 대법원과 같은 상급법원의 판결이 없는 상황에서 하급심들이 엇갈린 판결을 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무엇보다 대법원 판결이 존재하면, 설령 그것이 따라야 하는 규범이 아니라 대법원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것을 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따르면 된다. 하급심에서는 그에 따라 판단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을 공부할 때도 법과 그에 대한 대법원의 해석을 ‘마치 법 그 자체인 것처럼’ 따르게 된다. 특히 반복되는 대법원의 판결 속에서 확인되는 법의 해석된 내용을 ‘판례(혹은 판례법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기존의 판례와 태도를 달리하는 하급심의 새로운 해석이 의미를 가질 때도 있다. 이는 세상이 바뀌면 이를 지탱하는 규범도 바뀌어야 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잘못된 것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법 자체의 수정이 쉽지 않은 것에 비해 해석의 변경은 좀 더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에 그 역할도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하급심에서 기존의 판결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고 난 후, 이러한 입장이 대법원에게 영향을 주어, 대법원이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기도 한다(물론 대법원의 입장 수정이 이러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경우 대법원은, 3명의 대법관이 참여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전원의 대법관이 참여해 판결을 내린다.

    이러한 변화가 하급심으로부터 시작하는 때에는, 그런 하급심 판결은, 통상적인 판결문과는 다르게, 기존에 옳다고 믿어지는 입장을 반박해야 하는 것이기에 매우 논리적이고, 또한 그 속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런 판결을 접할 때면, 비록 그 판결이 누군가에게는 찬성하지 못할 만한 것이라거나 종국에는 대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이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려고 하고 있음에 위로받는다. 그리고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 그 ‘나아지려 함’에 한껏 힘을 보태고 싶어진다.

    정성헌(경남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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