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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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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바다쓰기- 최율하(동화작가,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 기사입력 : 2023-03-30 20: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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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자주 탄다. 승하차 인원이 북적이는 강남이나 잠실에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면 순간 관상학자가 된다.

    ‘아니, 이 얼굴은?’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슬쩍 곁눈질한다. 몸의 뒤척임과 작은 손짓을 지켜보고 마스크 속에 가려진 표정을 추리하는 나날이 쌓이면 눈치도 쌓인다. 예컨대 휴대폰으로 예능이나 드라마를 즐기는 태도가 여유롭다면 의자에 한참 앉아 있을 사람이고, 중간에 시간을 살피거나 노선표의 간격을 세곤 소지품을 정리하면 금방 내릴 확률이 높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꽤 유용하다. 사실 이것보다 의자에 앉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겠다. 뭐,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아무튼, 나는 눈치가 빠르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 말의 저의는 모르겠으나 칭찬으로 여긴다. 눈치가 빠르면 지하철 의자에 쉽게 앉을 수 있고, 또한 센스있게 행동할 수 있기에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눈치는 곧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바인데, 이런 능력은 유치원 때부터 실력을 갈고닦아온 것이다.

    여섯 살쯤, 혹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난생처음 시험을 쳤다. 받아쓰기 시험이었다. 한글이 서툰 탓에 받침이 들어간 글자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받아쓰기를 바다쓰기인 줄 알았고 대체 바다에서 무엇을 쓰자는 건지, 하며 멀뚱멀뚱 있다가 다음 날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험지를 받았다. 그제야 받아쓰기가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친구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아니, 이 얼굴은?’ 불안한 척하지만 진심으로 불안하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이때부터 시험 날마다 사람의 표정을 관찰했고, 전날에 공부를 해왔을 것 같은 친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당당하게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줬다. 아빠는 의아해했다.

    “한글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는데 어떻게 90점 받았지?” “후후.” “우리 딸 천재인가?” “후후.”

    그까짓 훔쳐보면 돼, 하고 대답하자 아빠는 역시나, 하는 반응이었다. 아빠가 무슨 표정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약간 혼이 난 기분이라서 그 뒤로 정직하게 시험을 쳤다. 점수는 20점이었다. 하지만 다음부턴 30점, 40점이었고 이런 기세라면 100점도 금방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갑자기 슬럼프를 겪은 탓이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만 같았다. 시험지를 훔쳐보던 마음으로 유명 작가의 책을 들추곤 했었다. 그렇기에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은 아주 특별했다. 꾸준히 올바른 마음으로 글 쓰라는 듯했다. 마치 받아쓰기 20점을 받은 날 같았다. 나는 앞으로 30점, 40점 그리고 ‘120점’의 작가가 되도록 정진할 것이다. 미래의 수많은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 지하철에서 눈치를 살폈듯 세상에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은 글인지,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글인지 항상 살펴야겠다. 당장에도 그렇다. 이번 금요 에세이의 반응은 어떨까? 잘 읽어줄까?

    최율하(동화작가,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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