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8일 (일)
전체메뉴

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청년예술인 (13) 연극배우 정으뜸

연극할 때 삶이, 살아있음을 느껴요

  • 기사입력 : 2023-08-04 08:09:08
  •   
  •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희극작품 ‘뜻대로 하소서’에서 “세상은 무대요, 우리는 배우다. 각자 퇴장도 하고 등장도 하면서 주어진 시간에 자신의 역할을 하는 7막의 연극”이라며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다.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무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는 시간이 되면 퇴장하는, 한 편의 연극 같은 삶을 살다 간다.

    지난해 국민배우로 칭송받는 이순재(리어왕)·신구(두 교황) 두 거장이 구순의 나이에도 연극무대에 올라 열연을 펼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또 TV 드라마에서 선 굵은 연기로 유명한 유동근과 정보석이 연극무대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스타성과 흥행성을 보장받는 정상급 배우들이 카메라를 벗어나 연극무대에 다시 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2년 전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연극배우 정으뜸씨. 그는 요즘도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자며 틈나는대로 전통시장을 찾아 생생한 사투리와 살아있는 몸짓을 배우며 연극의 매력에 빠져 산다.
    2년 전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연극배우 정으뜸씨. 그는 요즘도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자며 틈나는대로 전통시장을 찾아 생생한 사투리와 살아있는 몸짓을 배우며 연극의 매력에 빠져 산다.

    사천에 본거지를 둔 극단 장자번덕에서 상임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12년 차 연극배우 정으뜸씨. 2년 전 ‘운수대통’(이훈호 연출)이란 작품으로 제39회 경남연극제에서 단체 대상과 개인 우수연기상을 받은 데 이어 대한민국연극제에서도 단체 은상과 개인 신인연기상을 받으며 촉망받는 배우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타고난 재능에 지독한 연습벌레 근성이 합쳐지면서 2020년부터 내리 3년째 경남연극제 우수연기상을 거머쥔 그를 지역 연극계에선 ‘아직 진가를 다 발휘하지 않은 보석’으로 평가한다. ‘운수대통’에서 폐지 줍는 ‘귀먹은 할멈’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해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어린아이, 노인, 시장상인, 간호사 등 어떤 역할을 맡겨도 기대 이상으로 잘 쳐내는 실력파 배우로 통한다.

    청소년연극제 수상 후 연극과 진학

    김해서 극단 생활 등 배우의 길로

    2020년 사천 장자번덕으로 옮긴 후

    3년 연속 경남연극제 우수연기상

    2021년 경남도립극단 연극 <토지2>의 새침이 역(오른쪽).
    2021년 경남도립극단 연극 <토지2>의 새침이 역(오른쪽).

    “눈 깜짝할 새 10년이 훌쩍 갔네요. 김해 분성여고 시절 밀양청소년연극제에 나가 덜컥 최우수 연기상을 받으면서 배우의 길로 들어섰고, 부산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연극수업했지요. 졸업 후 곧바로 김해 극단 이루마 상임단원이 되어 8년 동안 작가, 연출, 배우, 스태프 등 평생 연극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문법과 자세, 생활방식까지 익히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더 자신을 채찍질하고 새로운 세계와 부딪쳐보기 위해 서른이 되던 해인 2020년, 현재의 극단 장자번덕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극은 삶을 담는 한 편의 드라마라 생각해요. 처음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들이 궁금해서 배우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죠. 연극을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중요한 그 순간을 관객들과 공유할 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는 요즘도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자고, 연습과 공부에 전념할 정도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래와 춤, 미술, 심지어 음향 분야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배우기를 즐겨한다. 다큐를 보며 식견을 넓히고, 틈나는대로 전통시장을 찾아 생생한 사투리와 살아있는 몸짓을 배운다.

    무대 올랐을 때 살아있다는 느낌

    관객과 함께 나눌 때 가장 기뻐

    관객에 인정받고 함께 작업하고픈

    사람 냄새 나는 배우로 사는 게 꿈

    2020년 장자번덕 연극 <운수대통>에서 폐지 줍는 귀먹은 할멈 역.
    2020년 장자번덕 연극 <운수대통>에서 폐지 줍는 귀먹은 할멈 역.

    “지금까지 연극과 뮤지컬 등 70여 편의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한 편 한 편이 저를 성장시켜주었지만 저는 현재에 만족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도 꿈을 꾸고 앞으로도 계속 꿀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에게는 만족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는 것이라는 그. 연극을 해서 인생관이 벌써 웅숭깊어진 것일까. 좀 더 까칠한 질문으로 다가갔다. 안정된 직장과 높은 연봉을 최고의 선망으로 삼는 요즘 젊은 세대와 사뭇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삶은 선택의 문제이고, 그것이 결국 그의 인생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라며 웃어넘겼다.

    “한 5년 전쯤으로 기억해요. ‘적산가옥’이라는 작품에서 최승림 역을 맡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작품과 배역에 몰입하지 않고 흉내만 내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때 아! 배우를 하면 안되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침 이훈호 연출께서 ‘나를 버려야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를 하는지 몰라요.”

    ‘적산가옥’(백하룡 작·이훈호 연출)은 일제시대 때 친일파 집안이 스스로 몰락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으로 2시간 넘는 작품을 이끌어가면서 말투와 행동 습관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허물어야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요즘 들어서 연극은 종합예술이고 집단적 창조예술임을 새삼 깨달아요. 연극은 한 개인의 상상력에 의해 구현되지 않잖아요? 작가, 연출가, 배우, 미술감독, 음악감독, 조명감독 등 수많은 예술가와 기술자, 그리고 관객이 함께 만드는 합작품이니까요. 제가 힘들 때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그는 지역에서 연극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은 미쳤거나 도를 통했다는 말과 통한다며 너스레를 떨다가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말할 땐 힘을 실어 말한다. OTT와 유튜브 등 연극을 둘러싼 콘텐츠 생태계의 변화가 심상찮다며 다소 무거운 질문을 던져도 그의 대답은 거침이 없다.

    “연극도, 세상도 점점 빨라지고, 짧아지고 있어요. 너무 빨라 어지러울 지경이죠. 하지만 예술가라면 세상의 속도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속도가 세상의 속도가 되도록 말이죠.”

    2021년 경남예술극단 연극 <술래야 놀자>의 노파 도깨비 역.
    2021년 경남예술극단 연극 <술래야 놀자>의 노파 도깨비 역.

    핵심을 찌르는 단호한 그의 말투에서 연극의 미래와 예술가의 사명, 새로운 기술과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젊은 연극배우의 배짱이랄까 당당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현재 경남연극배우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고등학교에 연극동아리가 없어지고 갈수록 배우 지망생이 줄어드는 것이 못마땅하다. 현재 회원 수가 70여 명인데, 30대 아래가 채 20명이 안된다 한다. 좋은 배우, 훌륭한 연극인이 되어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다리가 되어주고 싶은데 돌아가는 형국이 그렇지 않아 안타까운 모양이다.

    2022년 장자번덕 연극 <바보처럼 바보같이>의 마담 역.
    2022년 장자번덕 연극 <바보처럼 바보같이>의 마담 역.

    “연극만이 아니라 전 예술 분야에서 젊은 세대 유입이 안돼 걱정입니다.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고요. 사회가 함께 해법을 찾아야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삶의 아름다움과 존엄함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다는 온전한 느낌을 관객과 함께 나눌 때 가장 기쁘고, 그 매력 때문에 연극배우를 한다는 정으뜸씨. 그는 어떤 상을 받고 싶다거나 어떤 훌륭한 연극배우를 닮고 싶다는 식의 장래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인정받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이고, 사람 냄새 나는 배우로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 말한다.

    막이 내리고 관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홀로 객석에 앉아 무대를 골똘히 바라보는 배우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 갯벌 같은 허허로움과 막막함을 견뎌내고, 살아있는 연기로 관객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는 오늘도 찜통 같은 연습실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김우태(시인)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