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춘문예 ‘시 ’심사평]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 출렁이는 물로 잘 비유
- 기사입력 : 2024-01-01 22: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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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열심히 걸어서 자정에 당도하면 다시 오늘이 시작되듯이 시를 열심히 써서 어떤 지점에 도착하면 거기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많은 시들이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마다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를 이해한다고 하면 시는 이해받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면서 또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지난한 여정이 담긴 시들이 1300여 개의 층계를 이루고 심사자들의 눈앞에 조금은 긴장한 듯 당당하게 도착해 있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 한 편을 가리는 작업은 꽤 고통스런 일이었다.
한 실직자의 허무를 눈사람과 그림자로 풀어낸 ‘눈사람과 그의 그림자’는 조금 촘촘한 듯한 문장들의 보폭이 아픈 돌팔매질이 되었다가 스르르 중력을 잃고 길 가 어딘가로 굴러가버리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시적 인식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서술어의 처리를 조금 더 고민해보면 아주 단단한 시가 될 것 같았다. 한 입 베어 물어 잇자국이 선명한 사과의 흔적으로 너와 나의 관계의 현상들을 그린 ‘사과의 저녁’에 묻은 흙이 오래 눈에 남았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인 저녁을 조금 더 들어가 보았다면 말 할 수 없는 깊이에 누구라도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고민 끝에 우리가 맨 위에 올린 작품은 ‘머그잔’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도 너무 많은 주체의 역할을 요구당하는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을 출렁이는 물로 비유하고 있는 점에 마음이 갔다. 높이 치솟아오르거나 좀 더 따뜻해져야 하거나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는 세계의 요구를 한 컵에 담아 흔들어버리고 싶은 반항이 감각적 성과를 높이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 손에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작품들을 아쉬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뻤고 좋은 시를 향해서 가끔은 에두르고 에두르다가도 그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다시 시작하기를 담담히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시의 층계들이 제각각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우선, 맨 앞에 놓인 ‘머그잔’에 주저없이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성윤석·조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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